나는 저널리즘의 본질을 이 만큼 신랄하게 표현한 문장을 보지 못했다. “If your mother says she loves you, check it.” “당신을 사랑한다는 엄마의 말도 사실인지 확인하라”쯤으로 번역되는 이 비정한 글귀는 시카고의 한 언론사(the City News Bureau of Chicago)에서 비롯되어 유명해진 금언이다. 수컷이 출산한다는 해마를 제외한다면, 지구상 생명체에게 가장 강렬하고 원초적인 사랑은 모성애가 아닐까? 그 신성불가침의 모성애조차 저널리스트에게 취재대상이라면, 팩트체크의 노력을 해야 기사가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 저널리즘의 정체성은 팩트체크에 있다. 긴 설명이 필요치 않다. 소위 ‘지라시’와 비교하면 직관적으로 설명된다. 나는 팩트체크의 유무가 지라시와 저널리즘을 구분하는 가장 명확한 기준이라 생각한다.
몇 년 사이 팩트체크(factcheck)란 표현이 부쩍 거론된다. 반갑지만 불길하기도 한 현상이다. 당연한 것이 당연하지 않은 것이 됐다는 반증일 수 있으니 말이다. 매체와 스피커들의 폭발적 증가, 무차별 뉴스복제와 속보의 무한경쟁, SNS와 알고리즘 내 뉴스소비성향 등 근래 미디어커뮤니케이션 세계의 현실은 정보유통의 민주화란 ‘빛’을 가져다 주기도 했지만 팩트체크의 매몰비용화란 그림자도 짙게 했다. 팩트체킹이 없거나 불충분한 지라시성 뉴스는 물론 정치적·금전적 목적을 위해 만들어 낸 허위조작정보마저 유통비용 제로에 수렴하는 디지털 디바이스의 수혜를 입어 대량으로 유통되고 있는 것이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그레샴의 법칙이 디지털정보유통시장에서도 작동되고 있다.
저널리즘의 팩트체크 기능이 쇠퇴해버린다면 어떤 세상이 올까? “거짓말을 크게 벌리고, 수시로 입 밖에 내면, 사람들은 믿기 시작한다”고 했던 독일 나치의 선전장관 파울 요세프 괴벨스의 무서운 통찰을 기억해야 한다. 인류는 이미 그런 인간들이 시도한 디스토피아를 뼈저린 경험으로 알고 있다.
저널리즘의 팩트체크 기능을 되살릴 사회적 노력을 배가해야 한다. 한국기자협회, 방송기자연합회, 팩트체크넷이 지난 7월부터 시상해오고 있는 ‘팩트체크상’은 그런 노력의 일환이다. 팩트체크는 육체의 수고로움, 영혼의 떨림, 바이라인의 책임, 비용의 지출 등을 수반하는 고군분투의 과정이다. 그러한 노력으로 모범적이고 뛰어난 팩트체크 기사를 만들어낸 언론인과 시민의 작품을 각각 1편씩 선정하여 매월 1회 시상한다.
아직 출품작이 많지 않다. 시상 초기여서 널리 알려지지 않은 탓도 있다. 출품 대상자들이 시상의 대상 범위를 좁게 보는 이유도 있는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팩트체크상은 일부 언론사들이 ‘팩트체크’의 취지로 별도의 명칭을 붙여 행하는 보도물들에만 국한하지 않고 있다. 팩트체크상의 대상은 사회의 다양한 분야와 채널을 통해 유통되고 있는 허위조작정보와 주장들에 대해 합리적인 근거를 바탕으로 사실을 바로잡으려고 노력한 모든 종류의 기사와 보도물들을 대상으로 한다. 저널리즘의 르네상스를 꿈꾸는 모든 언론인과 시민 여러분의 많은 도전을 바란다. 팩트체크상 출품자 참고(https://factchecker.or.kr/awar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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