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몇 달 간 전국 일간지와 방송의 주요 기사에 필자가 거주하는 텍사스주가 연일 등장한다. 사회면에 실릴 법한 범죄나 자연재해가 일어나지 않는 한, 지방에 관한 기사를 찾기 힘든 것은 한국이나 미국이나 마찬가지라 특정 지역이 종합면이나 정치·경제면에 나올 만한 사안으로 연일 세간의 주목을 받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테슬라 등 IT 기업들이 캘리포니아를 떠나 텍사스에 둥지를 튼다는 경제기사도 있지만 대부분은 공화당 주도의 논쟁적 의제에 관한 것들이다. 한참 마스크 착용·코로나19백신 접종 의무화에 반대하거나 투표권을 제한하는 내용의 선거법 개정으로 소란스럽더니, 최근엔 사상 초유의 낙태금지법으로 미국 전역을 들썩이게 하고 있다.
지난 달 1일 발효된 소위 ‘심장박동법(heartbeat bill)’이라 불리는 텍사스의 낙태금지법(Senate Bill 8)은 태아의 심장박동이 시작되는 6주가 지나면 강간 피해자 등도 예외 없이 낙태를 금지한다. 임신 6주는 임신을 자각조차 못할 수 있는 초기인 만큼 사실상 낙태를 전면 금지한 법이라는 게 중론이다. 게다가 낙태시술을 한 의료진은 물론 낙태 과정을 돕거나 방조한 이들도 처벌할 수 있도록 하는가 하면, 주 정부 대신 일반시민들이 낙태시술자나 조력·방조자를 고소하도록 해 승소할 경우 1만달러를 준다는 조항을 넣어 더욱 논란이 되고 있다.
사상 유례없는 텍사스의 낙태금지법은 미국 곳곳에서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플로리다, 사우스다코타 등 공화당이 우세한 주들에서는 텍사스와 유사한 법안을 준비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텍사스의 주법을 피해 오클라호마, 콜로라도, 뉴멕시코 등 인근 주로 원정 낙태를 떠나는 이들도 등장했다. 오클라호마의 한 병원은 낙태 환자의 3분의 2가 텍사스에서 온 환자들이라고 뉴욕타임스는 보도했다. 사인간의 고소를 장려한 법 조항에 따라 낙태를 시술했다고 워싱턴 포스트에 공개적으로 기고문을 낸 의사가 고소당하기도 했다. 고소인들은 해당 법의 위헌성을 공론화하고 법원이 이를 검토하기 위함이라고 밝혔지만, 앞으로 승소에 따른 보상금을 노린 이들이 무분별하게 소송을 제기할 가능성을 배제하긴 어렵다.
낙태는 미국사회에서 가장 논란이 되는 이슈 중의 하나로, 진보와 보수를 가르는 주요 가늠자 역할을 해왔다. 1973년 ‘로 대 웨이드(Roe v. Wade)’ 판결로 임신 24주 이전에는 낙태가 가능하다는 기준이 마련됐지만, 보수 성향의 정치인들은 낙태금지 기간 단축을 거듭 추진해왔다. 때문에 낙태 문제는 매 선거마다 주요 의제로 떠올랐고 내년 중간선거에 미칠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 텍사스주의 문제를 넘어 진보와 보수의 대리전인 셈이다. 텍사스의 낙태금지법에 전국 단위의 언론이 관심을 쏟는 것도, 연방대법원과 법무부까지 이 법의 효력을 두고 다툼을 벌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연방대법원은 텍사스의 낙태금지법 시행 전 이를 막아달라는 시민단체들의 가처분 신청을 기각했고, 법무부는 텍사스주를 상대로 이 법의 효력 중단 소송을 내 이달 6일 법 집행이 중단되기도 했다. 하지만 다시 연방항소법원이 법 집행을 재개하라는 결정을 내리면서 갈등과 혼란은 더욱 고조되고 있다.
흔히 텍사스의 선거 지도를 블루베리가 몇 개 담긴 토마토 수프에 비유한다. 대표적인 공화당 텃밭이지만 주도인 오스틴을 비롯, 소수의 민주당 성향 지역들이 섞여 있기 때문이다. 최근 10년새 토마토 수프 속 블루베리는 점점 커지는 추세다. 2020 센서스에 따르면, 젊은 비백인층(non-white)이 대거 유입되면서 전통적으로 백인·보수 중심의 텍사스 인구가 젊고 다양해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점차 왼쪽을 향하는 인구 분포와 달리 텍사스의 정책은 더욱 더 오른쪽으로 치닫는 모양새다. 그래서인지 텍사스 관련 기사를 읽기 두렵다거나, 텍사스를 떠나고 싶다는 말이 주변에서 자주 들린다. 텍사스의 달라진 정서에 부합한 결론이 나올지, 역사상 가장 보수적인 낙태금지법이 유지될지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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