엇박자를 이어가는 남북관계와 북미관계를 보면 ‘여우와 두루미의 식사’가 떠오른다.
2019년 2월 하노이 2차 북미정상회담이 결렬된 이후 단절된 남북, 북미 대화를 복원하기 위한 한미 양국의 노력은 일관되고 성실했다. 이인영 통일부 장관은 취임 직후부터 코로나19 등 감염병 방역 협력, 관광분야 교류와 협력, 기후위기 공동대응 등의 카드를 제시하며 목이 쉴 정도로 대화 재개를 외쳐왔다. 한미 북핵 수석대표들 역시 서울과 워싱턴D.C를 오가며 보건, 방역, 식수, 위생 등 인도주의적 협력 분야를 우선순위에 놓고 대북 대화 재개를 시도 중이다.
이런 한미의 움직임과 제안을 북한 당국은 철저하게 무시하고 있다. 지켜보기가 무안할 지경이다. 북의 썰렁한 침묵이 한미 양국 정부의 진정성에 대한 불신에서 비롯된 것 같지는 않다. 혹시 식탁에 오른 메뉴가 북의 희망과는 거리가 먼 것이어서 젓가락을 내밀지 않는 것은 아닐까?
북이 원하는 메뉴를 알려면 어떤 사안에 격하게 반응하는지를 보면 된다.
북은 7월 말 단절됐던 군 통신선을 전격적으로 복원했다가 한미 연합군사훈련이 시작되자 14일만에 다시 불통상태로 만들었고, 노동당 김여정 부부장과 김영철 통일전선부장이 담화를 통해 위협성 발언을 했다. 북한 선전매체 메아리는 지난 12일 남측의 ‘2022~2026 국방중기계획’을 놓고 “입에는 꿀을 바르고 손에는 시퍼런 칼을 든 동족대결 분자”라고 비난했다. 유독 군사 문제에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사실로 미뤄볼 때 북은 인도주의적 지원보다는 군사적 긴장 완화를 위한 실질적 조치를 기대하는 것으로 보인다.
북은 2006년 10월부터 2017년 9월까지 6차례 핵실험을 했던 풍계리 핵실험장을 2018년 5월 폐기했고, 북미 외교가 교착상태에 빠진 후에도 이를 복구하려 하지 않았다. 또한 2017년 11월29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화성-15형’ 시험발사에 성공한 이후 ICBM 발사시험을 하지 않았다. ICBM이 평양의 열병식에 등장한 것도 작년 10월 노동당 창건 75주년 기념 열병식에서가 마지막이었다. 올해 정권수립 기념일(9·9절) 73주년 열병식 대오는 남쪽의 예비군 격인 노농적위군의 트랙터부대와 경찰 격인 사회안전군이 채웠다.
북의 이런 태도는 자국 영토를 지켜낼 만큼의 핵무력을 완성했다는 자신감의 표현이자, 한미와의 관계를 악화시킬 생각이 없다는 대외 메시지이기도 하다.
대내적으로 북 당국이 가장 관심을 갖는 분야는 식량사정 개선, 국산품 품질 향상과 생산성 제고를 통한 경제 회생이다. 이는 북한 관영매체의 보도를 들여다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북의 대외 메시지와 대내 관심사를 종합하면, 김정은 정권은 소위 ‘자위적 핵무력’ 구축은 어느 정도 이뤄졌으니 이제 뱁새의 다리를 찢는 군비 경쟁을 멈추고 자원을 경제 부흥에 쏟고 싶은 것이고, 한미가 이런 사정을 헤아리고 호응해달라는 얘기를 하고 싶은 것 같다.
여우가 두루미를 초대해서 납작한 접시에 음식을 차려낸 것은 진정성이 없어서가 아니었고, 골탕을 먹이려는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역지사지가 부족했을 뿐이다.
Copyright @2004 한국기자협회.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