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엄마의 ‘최애’ 프로그램은 ‘골 때리는 그녀들’(SBS)이다. “이 프로그램이 그렇게 재밌대~”라며 소개해줬더니 “(진작) 재밌게 보고 있지~”라고 답했던 엄마는, 각 선수들의 특징을 줄줄 읊으며 팀별로 가장 좋아하는 선수를 꼽을 정도다. 지난 주말엔 본가에 가서 부모님과 ‘골 때리는 그녀들’을 함께 다시 봤는데, 이제는 엄마 나름의 해설을 덧붙이는 경지(?)가 됐다.
‘골 때리는 그녀들’ 속 선수들은 “여자가 축구는 무슨…” 따위의 편견을 거침없이 깨부순다. 쉰이 훌쩍 넘은 나이에 무릎에 물이 차고도 멋진 헤딩을 보여준 신효범, 상대가 찬 축구공에 두 번 연속 맞았어도 끝까지 볼 처리를 하고 난 뒤에야 쓰러진 차수민, 쉴 새 없이 뛰고도 “체력이 남아있다는 게 너무 화가 났다”는 이현이, 그리고 그라운드에서 승부욕을 거침없이 드러내면서도 동시에 서로를 믿고 응원하는 모든 선수들. 이들의 열정과 에너지는 보는 이에게도 가감 없이 전달되곤 한다.
엄마가 축구에 몰입하는 동안 나는 여자배구에 푹 빠졌다. 도쿄올림픽에서 선수들이 ‘4위’라는 놀라운 성적을 거두기도 했지만, 그 이상의 해방감을 선물했기 때문이다. 상대의 수비를 뚫는 강스파이크나 철벽같은 블로킹도 물론 좋았지만, 마음껏 포효하는 선수들의 모습이 내게 더 짜릿하게 다가왔다. 승리를 위해 온 정신을 집중하고, 강력한 힘을 보여주며, 기세 좋게 파이팅을 외치는 모습은 그 자체로 해방구였다.
아마도 이는 오랫동안 미디어가 만들고 비춰온 고정된 여성상에서 벗어난 모습을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일 터다. 미디어에선 다이어트에 성공하거나 성형을 해서라도 외적으로 아름다워진 여성에게만 주로 주목해왔다. 그뿐이랴. ‘오빠’들을 위해 애교를 보여주고, 날씬하고, 젊고, 여리고, 순한, 예쁜 인형 같은 여성의 모습이 화면을 독차지했다. 화면 속에서 이들은 늘 누군가에게 평가받고 보여지는 대상이 됐다.
어리거나 예쁘지 않은 여성은 자학해야만 버틸 수 있는 개그 무대에 서거나 억척스러운 ‘어머니’의 모습으로 등장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이런 환경에선 각기 다른 색을 지닌 현실 속 다양한 여성의 모습이 쉽게 납작해지기 마련이다. 많은 여성이 자신의 체형을 왜곡해서 인식한다는 여러 연구 결과는 미디어의 획일성이 현실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보여주는 일부일 뿐이다.
수적으로 더 많은 여성의 모습을 보게 된 것도 반가운 일이다. ‘노는 언니’(E채널)나 ‘밥 블레스 유’(Olive·종영), ‘송은이·김숙의 비밀보장’(팟캐스트)처럼 여성이 주축이 된 프로그램이 등장한 것이 불과 10년이 채 되지 않았다. “지난 1년 간 흥행한 한국 영화에서 남성 인물이 등장한 시간은 여성보다 2배 많고, 흥행 영화 캐릭터의 평균 나이는 여성 25.2세, 남성 34.4세였다”(‘백델데이 2021’)는 최근 조사 결과에서 볼 수 있듯이 미디어는 여전히 불균형하다.
요즘 주변의 여성 친구들은 너도나도 축구·배구·농구 등을 배우고 싶다는 이야기를 한다. 위 선수들이 보여준 것처럼, 함께 땀을 흘리고 투지를 불태우겠다는 의지를 보이며 배구공이나 축구화부터 샀다는 이들도 있다. ‘거친 승부의 세계’는 남성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걸, 이들은 이제 명확하게 안다. 그러니 이제 미디어 종사자들도 좀 더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예능·드라마·영화는 물론이고 뉴스에서까지 이렇게 ‘짜릿함’을 선사하는 다양한 여성의 모습을 보고 싶다.
박다해 한겨레21 기자의 전체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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