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영방송 재허가 대신 '협약제도' 도입 논의 첫발

방통위-언론학회 공동 세미나…"공·민영 구분 않는 현행 재허가·방송평가 제도 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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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게는 3년, 길게는 5년에 한 번씩 이뤄지는 지상파 재허가 심사에서 공영방송을 분리해 공적책무 이행을 약속하고 그 결과를 점검받는 ‘공영방송 협약제도’를 도입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방송통신위원회와 한국언론학회 공동 주관으로 3일 열린 ‘공영방송의 공공성 제고 방안’ 세미나에서다. 지난 2019년 방통위 주도로 만들어진 ‘중장기 방송제도 개선을 위한 정책제안서’에서 아이디어 차원으로 제안됐고, 올 1월 방통위가 발표한 ‘5기 위원회 비전 및 정책과제’에도 “공영방송의 경우, 공적책무 강화를 위해 재허가제도를 방통위와 공영방송 간 공적책무 협약으로 대체”한다는 내용이 포함되긴 했으나, 그 내용과 방식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가 이뤄진 건 사실상 이번이 처음이다.

이날 세미나 사회를 맡은 강형철 숙명여대 교수는 “가보지 않은 길”에 비유했고, 이준웅 서울대 교수는 “협약제도를 20년 동안 주장해왔다”며 “드디어 구체적인 이야기가 시작되는 것 같아 반갑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한국언론학회-방송통신위원회 공동 주관으로 3일 오후 한국프레스센터 18층 외신기자클럽에서 '공영방송의 공공성 제고 방안' 세미나가 열렸다. (사진=유튜브 생중계 화면 갈무리)

방송통신 분야 국책 연구기관이자 방통위 관계 기관인 정보통신정책연구원(KISDI)의 성욱제 방송제도연구실장은 이날 발제를 통해 현재 구상 중인 공영방송 협약제도의 내용과 향후 절차 등을 설명했다. 협약제도의 필요성이 등장한 배경에는 현재 방송법에 따라 이뤄지는 재허가 심사와 방송평가 등이 공영방송의 특성을 반영하지 못한다는 한계가 있다. 이를테면 KBS가 재허가 심사에서 탈락해도 국가 기간방송이란 특수성 때문에 현실적으로 재허가를 거부할 수 없는 문제 등이 있다. 성욱제 실장은 “현행 방송평가는 공·민영 방송을 차별화하지 못하고, 재허가 심사 역시 허가나 재허가를 거부할 수 없는 방송사업자에 대해 행정 소모적인 측면이 강하다”며 “공영방송과 정부 혹은 규제기관이 협약이라는 일종의 계약서로 어떤 것들을 하겠다고 약속하고 잘 이행했는지 점검해 그 결과를 활용하는 시스템을 도입하는 게 어떨까 하는 게 논의의 배경”이라고 설명했다.

협약제도는 이미 영국과 프랑스 등 유럽의 여러 국가에서 시행 중이기도 하다. 영국의 경우 BBC 설치법에 해당하는 칙허장(Royal Charter)에 따라 정부의 문화부 격인 DCMS와 협약을 체결하고, 이후 규제기구인 오프콤(Ofcom)이 BBC의 의무와 약속을 구체적으로 담은 운영 프레임워크를 발표하고 라이선스를 발급한다. 라이선스 안에는 BBC가 연간 어떤 채널에서 특정 프로그램을 몇 시간 이상 편성하고 얼마나 투자할지 등과 관련된 구체적인 의무와 약속을 적시하며, BBC는 이에 관한 이행실적을 담은 연차보고서를 작성해 평가받는다.

이 제도를 국내에 도입한다면 협약체결의 주체는 방통위(위원장)와 KBS(사장·이사장)가 되며, KBS는 기존의 재허가 심사나 방송평가, 경영평가에서 제외되는 대신 협약서에서 약속한 공적책무의 이행실적을 평가받게 된다. 이를 위해선 공영방송의 법적 정의를 명확히 하고, 공영방송의 공적책무 역시 방송법에 명확하게 규정하는 것이 필수다. 방송법의 전면적인 개정이 불가피한 이유다.

성 실장은 협약을 크게 공적 역할과 운영원칙 파트로 나누며 공적 역할에는 △신뢰할 수 있는 정보 제공 △창의적·고품질·차별적 프로그램 △다양한 공동체 반영 △문화전달·계승 및 국제교류 등이, 운영원칙에는 △시청자 참여·주권 △개방·투명성 및 설명책임 △보편적 접근 및 기술혁신 △운영 효율성 △상생과 협력 등이 포함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내용은 추상적인 선에서 그쳐서는 안 되며, 실천을 담보할 구체적인 약속들로 채워져야 한다고도 강조했다.

KBS가 방통위와의 실무 논의를 통해 이처럼 협약(안)을 작성하면 방통위와 KBS 이사회가 각각 심의·의결을 거쳐 협약을 체결하는 절차로 진행된다는 게 현재까지의 구상이다. 성 실장은 KBS 사장 임기 3년, 현행 재허가 기간 5년을 고려해 협약의 유효기간을 6년으로 정하고, 3년마다 종합평가 성격의 중간평가를 받는 방식을 제안했다. KBS는 이행실적 점검 결과를 1년마다 연차보고서로 공표해야 한다. 성 실장은 “재허가가 안 됐을 때의 페널티를 고려해 이 협약제도에도 페널티와 피드백 시스템이 없으면 국회를 통과하지 못할 거라는 우려가 있다”면서 “공적책무 약속 미 이행분에 대해 (방통위가) 시정명령을 할 수 있도록 하고, 평가결과를 수신료 산정이나 임직원 감사, 인사 등과 연계”하는 방안을 제안했다.

이날 세미나 참석자들은 공영방송에 대한 별도의 평가 제도가 필요하고, 그게 협약제도가 될 수 있다는 데에는 전반적으로 공감을 표했다. 하지만 협약에 담길 공적책무 내용이 얼마나 차별성과 독립성을 가질 수 있겠냐는 회의적 시각도 있었다. 정준희 한양대 겸임교수는 “협약 내용의 핵심은 공영방송사의 아이디어인데, KBS가 좋은 제안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의구심이 있다”고 전했다. 김동찬 언론개혁시민연대 정책위원장은 “여러 가지를 하기보다 몇 가지라도 구체적으로 우리가 합의할 만한 공적 역할을 정하고 몇 년이라도 성과를 내는 데 집중해서 시민들이 공영방송의 가치를 느끼도록 해야 하지 않나”라고 말했다.

몇 가지 한계나 방통위의 간섭 가능성 같은 우려에도 불구하고 “협약제도를 우리 사회에 도입하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고 이원 인천가톨릭대 교수는 말했다. 정준희 교수도 유럽 사례 등을 볼 때 단점이 있는 건 분명하다면서도 “지금까지 공영방송 문제의 핵심은 사장을 누구를 뽑느냐, 자기편으로 어떻게 만드냐의 문제였는데, 협약이 잘 만들어지면 사장을 뽑을 때 공적책무에 대한 이해 정도가 높고 이를 구현시킬 사람을 뽑을 수밖에 없다”며 “이것만으로도 대단히 장점”이라고 말했다.

성 실장도 “협약제도 도입은 무조건 지금보다는 낫다”고 주장하며 “일단 출발하고 보자는 거다. 이제 논의가 막 출발했으니 천천히 만들어가자”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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