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참여정부 시절 시작된 언론에 대한 징벌적 손해배상제도 도입 논의가 17년 만에 입법 초읽기 단계까지 진입했다. 지난 19일 문화체육관광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수적 우위를 앞세워 언론중재법을 단독 처리한 더불어민주당은 24일 법제사법위원회에 이어 25일 본회의 통과를 노리고 있다. 국내 언론·학계·시민사회는 물론 국제언론단체에서도 유례없이 일제히 우려와 반대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지만, 민주당은 민생입법이라고 주장하며 그대로 밀어붙일 태세다. 국민의힘은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로 본회의 처리를 막아서는 방법을 검토 중이다. 언론현업단체들은 24일 오후 3시부터 국회 앞에서 언론중재법 강행처리 중단을 촉구하는 필리버스터를 시작해 본회의 종료 시까지 이어갈 방침이다.
애초부터 모든 것은 ‘8월 국회 통과’에 맞춰져 있었다. 민주당은 ‘검찰개혁’에 이어 ‘언론개혁’에서 성과를 내기 위해 문체위원장이 야당 몫으로 넘어가는 9월 전 본회의 처리를 목표로 삼았다. “사회적 숙의가 필요하다”는 언론·학계·시민사회의 요구에 아랑곳하지 않고 속도전을 하면서 ‘의견수렴’이란 모양새로 각 단체(또는 언론 주체)의 의견을 부분적으로 수정안에 ‘끼워 넣는’데 그쳤다. 문체위 여당 간사인 박정 의원은 “야당 의견과 언론계의 의견도 다 수용했다”고 했지만, 당의 방침이었던 ‘8월 처리’ 목표만큼은 한 치의 양보도 없었다.
민주당은 이 법을 서둘러 처리해야 하는 이유로 ‘가짜뉴스 피해구제’가 그만큼 시급한 사안이고, 관련 개정안이 발의된 지 1년이 넘었다는 점 등을 들었다. 민주당 말대로 21대 국회 들어 ‘징벌적 손배제’ 법안이 처음 발의된 지는 1년 2개월이 지났다. 정청래 의원이 지난해 6월 대표 발의한 법안이 그것인데, 정 의원이 야당 시절인 2013년 같은 취지의 법안을 발의했던 시점부터 따지면 8년이 지난 셈이다.
그러나 지난 19일 문체위를 통과한 언론중재법 개정안은 정 의원이 지난해 6월 발의한 법안은 물론, 이낙연 대표 시절 민주당 내 ‘미디어·언론 상생 TF’에서 추진했던 법안과도 크게 다르다. 사실상 최종안의 뼈대가 됐다고 할 수 있는 김용민 의원안이 발의된 건 지난 6월23일. 불과 두 달 전의 일이다. 당내 미디어혁신특별위원회 위원장인 김용민 의원안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민주당 ‘대안’이 문체위 법안심사소위에서 논의된 게 지난달 6일. 그리고 같은 달 27일 법안소위를 거쳐 지난 19일 전체회의에서 의결되기까지 회의가 열릴 때마다 법안의 주요 내용은 계속해서 바뀌었다. 대선 유력주자인 이낙연 전 대표조차 정확히 내용을 파악하지 못하고 징벌적 손배 적용 대상에 유튜브까지 포함된 것으로 착각해 빈축을 샀을 정도다.
이번 개정안은 허위·조작보도를 정의하는 조항을 신설하고, 그에 따라 ‘허위·조작보도에 대한 특칙’을 만들어 “언론등의 명백한 고의 또는 중대한 과실로 인한 허위·조작보도”로 재산상 손해를 입거나 인격권이 침해된 경우 손해액의 최대 5배까지 손해배상액을 물 수 있도록 한 게 핵심이다. 민주당은 입증책임 주체가 모호하다는 비판을 의식해 막판에 ‘명백한’이란 수식어를 집어넣었다. 이용자 기준에선 사실상 기사삭제와 다름없는 열람차단청구권 도입은 원안대로 의결됐다. 다만 열람차단이 청구된 사실의 표시를 의무화하는 조항은 빠졌다. 정정보도 크기 및 시간·분량을 원 보도와 같거나 최소 2분의1 이상으로 강제하는 조항은 언론사의 정정보도 수용 부담을 크게 해 신속한 피해구제를 어렵게 한다는 수석전문위원의 지적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강행됐다. 징벌적 손배제 도입에 찬성하는 측에서조차 ‘불필요하다’고 지적한 ‘고의·중과실의 추정’ 조항은 6가지에서 4가지로 수만 줄어 살아남았다.
민주당은 이 법을 두고 “일반 국민과 기업을 위한 구제장치”라고 주장한다. 고위공직자와 대기업 임원 같은 소위 ‘정치권력’, ‘자본권력’은 징벌적 손배 청구를 못 하게끔 막았다는 점을 강조하면서다. 그러나 심석태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 교수는 이를 두고 “언어도단”이라고 한다. 징벌적 손배 제외 대상인 ‘공직자윤리법 제10조제1항제1호부터 제12호까지에 해당하는 사람’은 대부분 차관급 이상이다. “사회적으로 엄청난 영향력과 발언권을 가진 실질적인 실력자”이고 누구나 “공인이라고 생각”하지만 여기 해당하지 않는 사람은 “일반인 취급”을 받는다. 퇴직한 고위공직자도 마찬가지다. 배진교 정의당 원내대표가 “퇴임한 공직자, 전략적 봉쇄 소송이 가능한 규모의 기업까지 범위를 넓혀야 한다”고 주장한 이유다.
송영길 민주당 대표는 23일 “대통령이나 정치인들을 비판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지 않냐”며 “정권 비판의 자유가 제한되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하지만 이 법에 의하면 과거 최순실, 정윤회씨 같은 ‘비선실세’는 공인의 범주를 벗어나 소송을 남발할 ‘자유’를 갖게 되고, 그에 따라 정권 감시 보도도 위축될 수밖에 없다. 종교 비리나 혐오세력에 관한 보도도 마찬가지다. ‘가짜뉴스 공장’을 찾아내 ‘가짜뉴스 생산-유포-전달’ 과정을 분석해낸 한겨레의 <가짜뉴스의 뿌리를 찾아서> 보도는 최근 민·형사소송에서 모두 승소했는데, 개정된 언론중재법에 따르면 ‘가짜뉴스 유포자’로부터 오히려 징벌적 손배 청구를 당하는 것은 물론 그 전에 열람차단청구가 받아들여져 기사를 볼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 송용창 한국일보 논설위원은 페이스북에 쓴 글에서 언론중재법이 “내부 고발 또는 익명의 제보에 근거한 ‘폭로형 기사’”와 “사회 고발형 기사”를 무력화시킬 것으로 예상했다. 그는 “허위 기사에 대한 징벌적 손배, 고의과실 추정 등으로 취재원 보호가 어렵게 돼 내부자들도 위험을 감수하면서 제보를 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면서 “일반인들과 아무 상관 없지만, 익명의 내부 폭로를 막을 수 있으면 정부 권력 기관으로선 정말 좋은 법”이라고 꼬집었다. 원로 언론인 단체인 자유언론실천재단은 지난 23일 기자회견을 열고 “현 법안은 교각살우의 우를 범할 수 있고 법의 실익보다는 부작용이 더 크다”면서 “이 법안의 강행처리 중단을 간곡하게 호소하며 시민사회와 학계, 언론현업단체 등이 공동으로 참여해 사회적 합의를 이뤄낼 국회 내 특별위원회 구성을 제안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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