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랙 바깥의 비진학자

[언론 다시보기] 윤서 대학입시 거부로 삶을 바꾸는 투명가방끈 활동가

윤서 대학입시 거부로 삶을 바꾸는 투명가방끈 활동가

흔히 시험은 달리기 경기에 비유되곤 한다. 경기 결과에 따라 순위를 매기고 그 순위가 평생 인생에 영향을 미치는, 많은 게 걸린 경기로 말이다. 새로운 일을 구할 때도, 심지어 ‘대학거부’를 해도 학창시절에 “몇 등급”이었는지 질문을 받는다. 우리 사회는 어디서든 요구하는 학벌을 스펙이며 자격이라고 부르지만, 그 사회는 이미 학벌 중심 사회라 학벌 외에 다른 상상을 할 수 없기 때문에 그런 것 같다.


달리기 경기는 ‘공정’하지 않다. 애초에 달리는 개인들이 제각기 다른 환경과 자원을 가졌다. 누구는 달리기 연습에 매진할 수 있었지만 누구는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면 출발점이 동일해도, 제아무리 똑같은 유니폼을 입고 똑같은 신발을 신었다고 해도 공정할 수 없다. 결정적으로 우리는 이 달리기를 원했는가? 눈 떠보니 달리고 있었지, 원해서 경주에 참여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2018년에 나는 대학을 가지 않고 ‘대학입시거부선언’을 했다. 그해 거부 선언의 제목은 <멈춰 서자, 새로운 고민을 시작하자>였다. 언제 끝날지도 모르고 많은 사람이 다치는 경주, 불안하고 막막하지만 멈춰보겠다고 선언했다. ‘느려도 괜찮아’가 아니라 왜 달려야 하는지 질문하고 멈추는 것. 나는 그것이 우리가 발 딛고 선 트랙, 무한경쟁과 능력주의의 판도를 바꿀 수 있는 첫 번째 행동이라고 본다.


경주 트랙 위에 있으면 필연적으로 순위가 매겨진다. 경기에 참여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트랙을 이탈한다면? 달리기 경기에 참여한 사람은 또 다른 참가자와 경쟁한다. 트랙 바깥을 지나고 있는 사람과 경쟁하지 않는다. 우리가 모두 트랙 바깥으로 나가면 어떤 세상이 될까? 나영 지구지역행동네트워크 활동가는 세계인권선언 70주년 연속 토론회 발제문에서 “우리는 기울어진 운동장이 아니라 운동장 자체를 문제 삼아야 한다. (···) 평등은 각기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운동장을 해체시키고 재구성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1등급 1%와 나머지 99% 중 어느 한쪽이 되는 게 아니라 평가와 순위를 거부하는 선택지도 있는 것이다.


때문에 부당한 경기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이 늘어났으면 좋겠다. 우리 사회에 ‘비진학자’ 혹은 ‘거부자’의 존재가 가시화되고 늘어나야 하는 이유는 그 선택이 강요되었던 생애주기의 과업에서 벗어나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단순히 대학에 가지 않는 비율이 늘어나는 것도 그 나름의 의미가 있겠지만 대학을 가지 않는 이유가 학벌이 더 이상 내 가치를 나타내는 간판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라면, 그 자리를 또 다른 능력과 자본의 부산물이 대체되게 된다면 경계해야 한다. 명찰만 바꾼 똑같은 문제이다.


그러므로 달리기 경기에 질린 모두에게 트랙 바깥으로 눈을 돌리길 권유한다. 시민사회, 국가, 언론이 그 표지판을 세울 수 있도록 역할을 해준다면 더 좋겠다. 나 역시 어딘가에서 “트랙 이탈 환영” 피켓을 들고 어딘가로 죽은 듯이, 죽일 듯이 뛰어가지 않아도 살만하다고 얘기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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