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들에게 취재를 허하라

[컴퓨터를 켜며] 김고은 기자협회보 편집국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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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고은 기자협회보 편집국 차장

며칠 전 인터넷 커뮤니티 게시글 하나가 화제였다. 지하철 3호선에서 한 여성이 쓰러졌는데, 짧은 반바지 차림이어서 남성들이 돕지 못하고 주변 여성들이 열차 밖으로 부축해 나갔다는 요지의 글이었다. 이 글은 ‘핫팬츠’, ‘성추행범 몰릴까 봐’, ‘남성들 외면’ 식으로 일부 내용이 각색된 채 기사화됐다. 최초 보도한 기사는 지난 5일 네이버에서 많이 본 뉴스(해당사 기준) 2위에 올랐고, 댓글 수로는 1위를 기록했다. 주요 댓글은 이렇다. “당연한 결과지 여자는 돌같이 봐야지 건드리면 패가망신한다.” “내 마누라 내 딸 외에는 절대 도와주지 마라. 괜히 경찰서 들락거리게 된다.”


이틀 뒤, 상황은 ‘반전’을 맞았다. 당시 여성 승객이 쓰러진 사실을 119에 최초 신고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인터넷에 글을 올리면서다. 이 글 역시 여러 언론에 보도됐고, 실제로는 남녀 가리지 않고 쓰러진 여성 승객을 도왔다는 증언이 알려지면서 ‘사건’은 단숨에 ‘미담’으로 전환됐다. MBC는 지난 9일 119 최초 신고자와 현장 출동 역무원 인터뷰를 바탕으로 팩트체크를 했는데, “해당 역무원은 자신에게 언론에서 확인이 들어온 건 처음”이라고 했다.


언론인권센터도 지난 6일 ‘취재 없는 기사가 맥락 없는 혐오와 갈등을 부추긴다’는 제목의 논평을 냈다. 논평팀은 해당 시점에서 “이번 사건을 유일하게 취재한” 기자와 통화하면서 “대부분의 언론사가 취재 없이 기사를 썼는데 어떤 이유로 취재를 하게 되셨나요?”라고 물었는데, “수화기 너머로 이 질문을 ‘기자’에게 던지는 심정은 참담하기 그지없었다”고 했다. 덩달아 참담함을 느낀 건 비단 이번 사안에만 국한된 일이 아니어서다.


온라인 커뮤니티 발 보도는 하루에도 수십 건 쏟아진다. 기자협회보(2036호) 분석에 따르면 올 상반기 커뮤니티 발 보도량은 지난해 동기 대비 40% 이상 증가했다. 소위 ‘장사가 되기’ 때문이다. 갈등을 부추길수록 효과는 극대화된다. 주장의 사실 여부나 맥락은 굳이 확인할 필요 없다. 반박 글이 올라오면 또 기사로 쓰면 그만이다. 그렇게 ‘갑론을박’을 만들고, 언론은 관전자의 자세를 취한다. 이 상황이 과연 누구에게 도움이 되는 걸까.


언론‘고시’로까지 불리는 힘겨운 관문을 통과한 기자들이 컴퓨터 앞에 앉아 인터넷 커뮤니티나 소셜미디어만 들여다보며 기사를 쓰는 상황을 기대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기자의 능력을 페이지뷰(PV)나 구독자 수로 평가하며 ‘취재 경쟁’이 아닌 ‘조회수 경쟁’에 내모는 것은 누구인가. 사실 확인이 안 돼도, 취재가 안 됐어도 “일단 써”라고 지시하는 목소리는 누구인가.


전국언론노동조합이 2019년 일간 신문 종사자 530명을 대상으로 디지털 충격이 취재 관행에 미친 변화를 조사한 결과 기사가 부실하다고 느낄수록, 속보 중시 경향이 심하다고 느낄수록 직무만족도가 낮다는 게 확인됐다. “지나치게 속보성만을 강조하면 기사의 질이 나빠질 뿐만 아니라 기자 직업의 자긍심도 훼손된다”고 연구팀은 지적했다. 하루에도 몇 건씩 기사를 쓰고도 “기레기가 기레기짓했다”고 조롱받는 작금의 상황을 방치해선 안 된다. 기자들에게 시간을 주고 취재를 허하라. 쉽게 쓰여진 기사는 쉽게 지워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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