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23일 저녁 8시

[글로벌 리포트 | 일본] 황현택 KBS 도쿄특파원

황현택 KBS 도쿄특파원

2020도쿄올림픽의 막이 올랐다. 7월23일 저녁 8시 일본 도쿄 국립경기장. 녹색 등 5가지 색상을 모자이크 형상으로 섞은 6만 800여 관람석 전체가 텅 비었다. 하객 없는 결혼식장처럼 개회식은 쓸쓸하고, 삭막하고, 적막했다.


제126대 나루히토(德仁) 일왕이 토마스 바흐 IOC 위원장의 초청을 받아 경기장에 들어서면서 개회식 시작을 알렸다. 일본 국기 ‘히노마루’가 게양되고, 일본 국가 ‘기미가요’가 연주됐다.


5년을 갈고 닦은 선수들이 메인 스타디움 트랙을 밟았다. 환호와 함성은 없다. 서로의 사진을 찍어주며 현장을 기록할 여유도 없다. 선수들은 ‘거리 두기’를 하며 띄엄띄엄 입장했다. 개회식 종료 시각이 밤 11시에서 30분이나 늘어난 이유다. 이미 우간다(2명), 세르비아(1명), 이스라엘(1명) 선수단에서 코로나19 확진자가 나왔다. 북한 등은 일찌감치 불참을 결정했다.


“제32회 근대 올림피아드를 축하하며, 여기에 올림픽 도쿄 대회의 개회를 선언합니다.”


일본의 ‘상징 덴노’(象徵天皇), 일왕이 개회를 선언했다. 올림픽 헌장에 이미 정해져 있는 문구다.


한 달 전, 일왕은 “올림픽 개최가 (코로나19) 감염 확대로 이어지지 않을까 염려한다”는 이른바 ‘오코토바(おことば·말씀)를 낸 바 있다. 왕실 업무 담당 기관인 궁내청 장관의 입을 빌려서다. 일본 헌법은 일왕의 정치적 발언을 허용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속내와 달리 대회를 ‘축하하지 않으면 안 되는’ 입장, 살짝 찌푸려진 일왕의 미간이 TV 카메라에 잡혔다.


반면에 로열박스 안 아베 신조 전 총리의 표정은 환했다. 그는 일본 월간지 하나다(Hanada) 8월호 인터뷰에서 “반일(反日)적인 사람들이 올림픽 개최에 강하게 반대하고 있다”고 힐난했다. 지난달 아사히신문 조사에서 ‘올림픽 취소·재연기’ 요구는 60%였다. 총리를 9년 넘게 했다는 자(者)가 국민 다수의 소박한 우려를 일도양단으로 깎아내리고, ‘반일 딱지’까지 붙였다.


그 순간 개회식 하이라이트, 성화대에 불이 붙었다. 121일 동안 약 1만명의 주자가 47개 도도부현(광역단체)을 돌았다. 코로나19 탓에 봉송은 자주 중단됐고, 올림픽 반대 시위대로부터 물총 세례까지 받았다. 성화는 도쿄 시내 도로도 달리지 못했다. 인적 드문 공원 등에서 주자들끼리 성화봉을 마주치는 행사로 대체됐다. 조직위원회는 ‘토치 키스’(Torch Kiss·성화 입맞춤)라는 해괴한 단어를 만들어냈다.

지난 13일 일본 도쿄에서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해 마스크를 쓴 한 사람이 "2020 도쿄올림픽까지 10일"이라고 쓰여진 전광판 앞을 지나고 있다. 코로나19로 개막이 연기됐던 2020 도쿄올림픽은 오는 23일 무관중으로 개막한다. 뉴시스

환희, 감동과는 거리가 멀었던 이번 개회식은 연출자마저 없다. 기획·연출 총괄 책임자이던 사사키 히로시는 지난 3월 사임했다. 일본의 인기 여성 탤런트, 와타나베 나오미(키 158㎝·체중 107㎏)를 돼지로 분장해 개회식에 등장시키자고 한 그의 아이디어가 들통나면서다. 양성 평등을 강조하는 올림픽, 그것도 개회식에서 여성을 희화하려다 빚은 참사였다.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폐막식 때 아베에게 ‘슈퍼 마리오’ 옷을 입혀 깜짝 등장시켰던 게 바로 사사키였다.


도쿄올림픽은 이제 돌이킬 수 없는 현실이 됐다. 개회식 불과 10여 일 전, 도쿄에는 코로나19 긴급사태가 선포됐다. 앞으로 17일 동안 거의 전 경기가 ‘무관중’으로 치러진다. 하계올림픽 125년 역사상 처음이다.


일본 정부의 무모한 도박은 수많은 모순과 혼돈, 분단을 낳았다. 전 세계에서 5만명 넘게 모였는데, 누구 하나 ‘지구촌 축제’를 입에 담지 않는다. “메달보다 더 중요한 건 안전이다. 부디 무사히 돌아오라”는 당부만이 들릴 뿐이다.


TV로 개회식을 지켜본 한 도쿄 시민은 “스가 총리는 ‘도쿄올림픽을 인류가 신종 코로나를 이겨낸 증거로 삼고 싶다’며 김칫국을 마셨지만, 오히려 인류가 코로나19에 항복하기 직전까지 코너에 몰린 대회로 기록될 것”이라고 혀를 찼다.


개회식장 밖에선 여전히 ‘올림픽 반대’, ‘총리 퇴진’ 구호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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