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사에서 근무하는 A 기자는 지난해 11월부터 악성 이메일에 시달리고 있다. 정부기관이나 여당을 언급한 기사를 쓸 때마다 특정인이 쓴 욕설 이메일이 날아왔다. 초반엔 한두 번 오다 멈출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점점 횟수가 늘었고 욕설 수위도 높아졌다. 해당 주소를 수신거부해도 소용없었다. 발송자는 다른 주소로 이메일을 보냈다. 다시 수신거부를 하면 또 다른 주소로 이메일이 왔다. 형식과 문체를 볼 때 같은 사람이 보낸 것으로 추정되는 이메일 주소가 15개에 달한다. 참다못한 A 기자는 발송자를 고소하기로 했다.
A 기자는 “같은 사람에게 지속적으로 욕설을 듣다 보니 정신적으로 힘들어졌고 다음엔 무슨 짓을 할까 두려웠다. 기사를 쓸 때 또 그 이메일을 받지 않을까 생각하게 되더라”며 “계속 보내면 고소하겠다고 답장했는데도 멈추지 않았다. 스트레스도 크지만 이런 행위가 잘못됐다는 걸 깨닫게 해주고 싶다”고 말했다.
A 기자가 발송자를 고소할 수 있는 법적 근거는 정보통신망법상 불안감조성, 업무방해죄 등이다. 정보통신망법은 ‘공포심이나 불안감을 유발하는 부호·문언·음향·화상·영상을 반복적으로 상대방에게 도달하게 한 자’를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1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규정한다. 위력에 의한 업무방해 혐의도 적용할 수 있다. 이메일 내용에 따라 협박죄가 성립할 여지도 있다. 이메일은 공연성이 없어 모욕과 명예훼손엔 해당하지 않는다. 다만 이메일 발송 인증화면이 커뮤니티 또는 공개 게시판이나 댓글에 올라갔다면 혐의가 성립된다.
취재보도 공적기능 마비시킬 의도... 기자들, 피해 반복돼도 고통 삭여
여러 혐의로 고소가 가능하더라도 기자 개인이 소송에 나서는 덴 부담이 크다. 하지만 이메일·댓글 같은 언어폭력 피해를 호소하는 기자에게 회사 차원의 지원은 미흡하다. ‘기자라면 그런 것쯤은 참아야 한다’는 문화가 여전한 탓에 기자들은 고통을 혼자 삭여야 할 때가 많다. 변호사인 양재규 언론중재위원회 기획팀장은 지난해 1월 시행한 산업안전보건법상 사업주의 의무를 들어 언론사가 기자를 보호·지원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양 팀장은 “기자에게 위해를 가하는 건 취재보도의 공적기능을 마비시키려는 의도가 있다고 볼 수 있어 가벌성이 크다”면서 “기자들이 고소를 생각하거나 회사에 도움을 요청하는 것은 끝까지 견디다 힘에 부쳤기 때문이다. 산업안전보건법에 따라 언론사(사업주)는 기자(근로자)를 보호해야 할 의무와 책임이 있고, 제3자로부터 피해를 당했다면 적절한 법률지원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기자를 향한 언어폭력에 체계적으로 대응하는 언론사는 많지 않다. 2018년 악성 댓글·이메일 법적대응제도를 마련한 중앙일보와 지난해 10월 언어폭력대응팀을 구성한 한겨레가 특별한 사례다. 두 언론사는 자사 기자들에게 피해접수를 받은 뒤 실제 소송을 진행하기도 했다. 오주영 한겨레 법무팀장은 “기초사실관계를 파악한 다음 내부 논의와 외부 자문변호인단 검토를 거쳐 법적조치 여부를 판단한다. 원칙적이고 적극적으로 대응하되 실익이 있는지, 소송 전후로 제2의 피해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는지 종합적으로 접근하고 있다”며 “법적 판단이 기대에 미치지 못할 수도 있지만 사전 보호와 사후 방어를 위해 최대한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회사 명의로 법적 대응 경고하니... 가해자들 온라인 가해 멈추더라”
박소영 중앙일보 행정국장도 회사의 적극적인 대응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박 국장은 “이메일과 댓글을 통한 폭력이 갈수록 늘고 있다. 대응 매뉴얼을 만들고 법무팀에 전담 직원을 배치해 법률지원을 하고 있다”며 “손쉬우면서도 가장 효과적인 대처는 회사명의 이메일로 법적 대응하겠다는 경고문을 보내는 것이다. 경고 이메일을 받은 가해자 대부분이 더 이상 악성 이메일을 보내지 않는다”고 말했다.
회사가 지원 제도를 마련하고 적극 대처하겠다는 의지를 피력하는 것만으로도 기자들의 정신적 피해를 줄일 수 있다. 언어폭력을 겪은 한 중견기자는 “기자일을 오래한 저도 겁이 나고 자꾸 신경을 쓰게 된다”며 “소송을 해서 꼭 이겨야겠다는 것보단 내가 이런 것 때문에 괴롭다는 걸 회사가 알아주는 것만으로도 심리적 안정감이 든다”고 말했다.
한겨레 언어폭력대응팀 구성에 참여했던 이정연 젠더데스크도 “법적 조치를 고려해도 가해자를 특정하지 못하거나 실제 처벌이 어려운 경우가 있는데, 피해자 입장에선 회사가 구성원 안전을 개인에 맡겨두지 않고 직접 나선다는 메시지 자체가 회복에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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