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초 인도네시아 전역에 물난리가 났다. 수백명이 목숨을, 수만명이 집을 잃었다. 황망한 와중에 인도네시아 한류 팬들이 기발한 재난 구호에 나섰다. 방탄소년단(BTS), 블랙핑크 등 각자 속한 팬클럽이나 저마다 좋아하는 한국 드라마를 내걸고 동시다발적으로 기부 대열에 합류한 것이다. 최소 기부금액이 우리 돈 80원(1000루피아)인데 며칠 새 1억원 넘게 모았다. 한류의 선한 영향력을 알린 이번 기부 방식은 현지에서도 이례적인 것으로 평가됐다.
수도 자카르타 거리에선 구걸이 직업인 사람들을 흔히 볼 수 있다. 무게 15㎏인 전통 인형 탈을 쓴 온델온델(ondel ondel), 은색 인간 마누시아실버(manusia silver), 거리 악사 픙아맨(pengamen), 만화 주인공 탈을 쓴 바둣맘팡(badut mampang) 등이다. 직접 얘기를 들어 보니 대부분 하루에 4000원 정도 벌어 생계를 꾸린다. 불법 딱지가 붙어 대대적인 단속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어느새 거리를 채운다. 3남매 엄마인 한 마누시아실버는 “사람들 덕분에 아이들을 먹여 살리니 감사하다”고 했다.
인도네시아는 기부가 생활 습관이다. 구걸이 직업인 이들에게 푼돈을 흔쾌히 나눈다. 빈민, 환자, 동물, 사원 건립 등 기부 대상을 가리지 않는다. 명절마다 기부하는 걸 당연히 여기고 거의 매일 기부를 실천하는 이들도 많다. 주변에 부모가 사망한 아이들은 형편이 어려워도 거두어 키운다. 베풀었다고 생색을 내지도 않는다. 인간의 도리라 여긴다.
특별한 사례 몇 가지와 대강의 분위기로 일반화하는 건 아니다. 인도네시아는 2018년에 이어 올해도 전 세계에서 가장 잘 베푸는 나라로 뽑혔다. 영국 자선지원재단이 전년도 각국의 자선, 기부, 자원봉사 활동을 따져 발표하는 ‘세계기부지수’에서 1위를 한 것이다. 특히 코로나19로 전 세계가 어려웠던 지난해 인도네시아의 점수는 오히려 상승했다. 10년치(2009~2018년) 종합 기록에서도 10위를 차지했다.
비결이 뭘까. 먼저 5대 의무로 빈민 구제(자카트)를 실천하는 무슬림이 87%인 인구 구성이 영향을 미쳤다는 풀이가 가능하다. 취재 결과 “알라의 축복을 받기 위해” “내 재물의 일부는 타인의 것이니 베풀라는 이슬람의 가르침을 실천하기 위해”라는 답이 많았다. 이들은 이슬람사원의 모금함이나 종교재단에 기부하는 걸 선호했다. 액수는 한번에 5000~1만 루피아(약 400~800원), 한 달에 20만~30만 루피아(약 1만6000~2만5000원)가량이다.
다른 종교의 역할 역시 무시할 수 없다. 현지인들은 6개 공인 종교(이슬람교 천주교 기독교 힌두교 불교 유교) 중 하나를 믿는다. 타 종교가 아니라 오히려 종교가 없는 사람, 즉 무교(無敎)를 이상히 여긴다. 기부와 자선은 모든 종교의 핵심 교리다.
인도네시아의 전통인 ‘고통 로용(Gotong Royong)’ 정신도 빼놓을 수 없다. 함께(Royong) 어깨에 진다(Gotong)는 뜻의 고통 로용은 우리나라의 두레나 품앗이와 닮았다. 다른 사람의 짐을 조금이나마 덜어줄 수 있다면 기꺼이 돕는 마음가짐이 몸에 배여 있다. 일의 경중이나 돈의 액수는 따지지 않는다. 남이 어려울 때 돕는 건 결국 자신을 돕는 길이고, 도움을 받으면 갚아야 한다는 삶의 이치가 대대로 이어져오고 있는 셈이다. 실제 인도네시아 최대 크라우드펀딩 기부 플랫폼인 ‘키타 비사(Kita bisa)’의 창업자는 기자와 인터뷰에서 “어릴 적 경험한 고통 로용 전통에 착안해 기부 사업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교육도 한몫한다. 5대 국가 이념인 ‘판차실라(Pancasila·다섯 가지 원칙)’는 유일신에 대한 믿음 외에도 공정하고 문명화된 인본주의, 통합, 사회 정의, 민주주의 실현 등을 담고 있다. 한 사립대 교수는 “집에서, 학교에서 어려운 사람들을 도우라고 꾸준히 가르친다”고 강조했다.
경제력 등 모든 면에서 인도네시아를 앞선다고 자부하는 우리나라의 세계기부지수는 2018년 60위, 2009~2018년 57위, 2021년 110위였다. 세상의 순위 경쟁이라는 게 대개 덧없지만 이것만큼은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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