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래시를 '남혐 논란'으로 보도하는 언론들

일부 기자들, 젠더 이슈 이해 없이
남초 커뮤니티 주장 그대로 받아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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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남초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나온 주장을 그대로 받아쓴 ‘남성 혐오 논란’ 기사가 쏟아졌다. GS25와 경찰청, 국방부 등의 행사 포스터 속 손가락 그림이 ‘남성 혐오’(남혐)라는 커뮤니티 사이트 속 주장을 그대로 받아쓰고, 기업과 정부, 공공기관의 ‘남혐 논란’이라고 표현한 기사들이다. 앞서 카카오 이모티콘, 유명인이 쓴 ‘허버허버’라는 표현이 ‘남혐’이라는 주장을 그대로 중계한 보도가 나왔고, 심지어 초록우산재단이 과거 페미니즘 모임을 진행했다는 이유로 후원을 중단한 이들의 “분노”를 보도한 기사들도 나왔다.

 

한국언론진흥재단의 뉴스 빅데이터 분석시스템 ‘빅카인즈’를 통해 54개 언론사가 지난 1월1일부터 지난달 31일까지 보도한 기사를 ‘남혐’으로 분석한 워드 클라우드. ‘남혐’과 연관성이 높은 단어일 수록 큰 글씨로 표시된다.

 

남초 커뮤니티의 ‘남혐’ 주장은 페미니즘에 대한 반발성 공격인 ‘백래시’라는 전문가들의 지적이 나온다. 여성 혐오가 사회에 만연해 있다는 걸 일깨워준 페미니즘 진영의 그동안의 문제 제기를 무력화시키고, 페미니즘 사상검증을 전방위로 확대하려는 움직임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문제가 아닌 걸 문제 삼는 전형적인 트롤링(관심 끌기)인 일부 남성들의 요구를 언론이 기사로 재생산하면서 하나의 정당한 의견으로 여기게 하고, 모든 남성의 주장으로 과잉 대표한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이정연 한겨레 소통데스크 겸 젠더팀장은 지난달 17일 <‘백래시’의 올바른 정의를 위해> 칼럼에서 “특정 성별이 사회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행위를 하는 데 성공하고, 실제 정부나 기업이 이들의 비상식적인 요구를 들어준다. 기업과 정부의 조치가 특정 성별에게 ‘하면 된다’라는 승리의 경험, ‘효능감’을 주는 행위”라고 이번 현상을 설명했다. 언론의 남초 커뮤니티 발 보도도 이들의 효능감을 증폭시킨 역할을 했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남초 커뮤니티 발 ‘남혐 논란’ 보도는 최근 한달간 집중됐다. 한국언론진흥재단의 뉴스 빅데이터 분석시스템 빅카인즈에 ‘남혐’을 키워드로 검색한 결과 지난 1월1일부터 5월31일까지 54개 언론사의 보도 수는 305건이었다. 1월까지 ‘남혐’이라는 내용이 들어간 보도는 3건에 불과했는데 ‘허버허버’가 남혐 표현이라는 주장에 카카오톡의 이모티콘 판매 중지 결정이 나온 당시인 3~4월엔 관련 보도가 34건으로 늘었다. 이준석 국민의힘 전 최고위원이 자신의 페이스북에 남초 커뮤니티의 주장을 옹호하는 발언을 하고, GS25의 사과 입장이 나온 지난달 2일 이후엔 보도량은 262건으로 급증했다.


이들 언론사의 보도 내용을 살펴보면 남초 커뮤니티의 주장과 기업, 공공기관의 사과와 입장문을 그대로 받아쓴 ‘단순 중계식’ 보도가 대부분이었다. 머니투데이의 <카카오뱅크도 그 손 모양?…또 터진 남혐 의혹>, 조선일보의 <하필 ‘고추’ 위에 그 손가락… 랭킹닭컴, 포장지 논란에 사과>, 한국경제의 등이 대표적인 보도 사례다. 남초 커뮤니티 주장이 페미니즘 ‘백래시’라는 설명을 덧붙이거나, 이번 ‘남혐 논란’에 대한 배경과 맥락을 분석한 기사는 일부에 불과했다.


이번 남초 커뮤니티 발 보도는 그동안 ‘남혐’이라는 단어를 무분별하게 사용하고, 성 평등 논의를 쉽게 ‘성 갈등’, ‘젠더 갈등’ 등으로 치부한 기존 언론 보도 관행과도 무관치 않다. 특정 성별에 대한 차별과 폭력이 실재하는 사회에서 ‘남혐’이라는 단어가 대등하게 쓰일 수 있을지 고민 없이 언론 보도에서 통상적으로 쓰이는 게 현실이다. 경향신문의 지난달 14일자 <근거 없는 ‘남혐’ 정치인·언론 타고 공론장으로…‘페미니즘 백래시’> 보도에서 김수아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여성학협동과정 부교수는 “젠더 갈등이라는 프레임은 중립적 시각에서 평등한 권리를 가진 두 주체 간에 의견이 대립하는 것처럼 상상하게 만든다”고 지적한 바 있다.


이정연 젠더팀장은 언론이 남혐, 젠더 갈등이라는 프레임을 제공하는 건 유독 젠더 이슈를 단순화하고, 현상을 분석하는 데 게으른 기자들의 행태에서 비롯됐다고 설명했다. 그는 “경제 성장률에 대한 기사를 쓴다고 해도 이유나 예측 상황 등의 맥락을 보도하는 게 당연하고, 기본적으로 기자가 미리 습득해야 할 건데 왜 젠더 분야에서는 그런 이해와 학습이 없다시피 한 채로 함부로 보도가 나가는지 의문”이라며 “언론이 현상을 보여준다면서 무슨 말이든 다 보도하는 게 아니지 않나. 다층적이고, 다원적인 문제들이 나타나고 있는데 현상을 이해하려는 노력 없이 마치 갈등이 명확한 것처럼 착각하게 만드는, 단순히 문제를 명명하고 독자들이 고민할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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