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도로 내몰고, 진실이 담겨있지 않은 신문을 배달해야만 했던 그때의 심경을 어떻게 다 표현하겠어.”
1980년 5월18일부터 27일까지 광주에선 신문이 배달되지 않았다. 5·18민주화운동 17주년을 맞은 1997년 기자협회보는 80년 5월 당시 광주지역 신문지국을 운영한 지국장 최상백씨와 남방남씨를 인터뷰한 기사를 실었다. 기자협회보는 5월15일자 기사에서 “이들에게는 광주의 참상과는 또다른 생존권의 문제가 닥쳐온 셈”이라며 “신문이 배달되지 않았던 그 열흘간, 그리고 배달이 정상화된 이후에도 지국장들은 남모를 고초를 감내해야 했다”고 보도했다.
80년 5월28일 열흘 만에 완전히 차단됐던 교통·통신이 풀리며 두 지국장은 다시 신문을 배달할 수 있게 됐다. 하지만 이들은 “신문 돌리는 게 무서웠다. 제대로 보도하기는커녕 ‘폭도’로 몰았지 않나. 먹고 살려니까 일단 배달은 해야겠는데 독자들 입장에선 ‘죽일 놈’이었겠고, 고민하다 일부만 배달했다”고 말했다.
이들은 그날의 광주에서 목격한 참상도 풀어냈다. 당시 조선일보 광주지사가 있던 금남로 2가에서 남씨가 본 팬티 바람의 젊은이들이 공수부대원들에게 빌고 있던 모습. 최씨는 항쟁 기간 동안 연락이 끊어진 처남을 찾기 위해 전남대병원, 기독병원 등 인근 병원에 안치된 수백여구의 시체를 뒤지고 돌아다녔다. 당시 어느 지국장은 시 외곽으로 신문을 구하러 나갔다가 계엄군에게 잡혔다는 얘기도 돌았다.
항쟁 이후 시위를 ‘폭동’으로, 광주시민을 ‘폭도’로 지칭한 신문이 나오자 신문지국에는 “그런 신문보고 누가 돈 내겠느냐”는 항의 전화가 비일비재했다. 당시 젊은 사람들을 주축으로 불매운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언론이 곡필하니까 해마다 광주 얘기가 나왔던 것 아니야. 기자들이 목이 떨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용기 있게 진실을 알렸다면 이러진 않았을 거야. 이제 그런 일은 우리 세대에서 끝나야지. 그러기 위해서는 언론이 바로서야 해.” 당시 기사에서 남씨는 이렇게 말했다. 5·18민주화운동 41주년이 곧 다가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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