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비극 관점서 벗어나… 4·3의 발발 원인에 초점

[지역 속으로] 조승원 KCTV 제주방송 기자
4·3 73주년 특집 다큐 '섬의 기억' 제작기

조승원 KCTV 제주방송 기자

“1947년 3월1일을 기점으로 하여 1948년 4월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을 말한다.”


제주4·3특별법이 규정한 제주4·3사건(이하 4·3)의 정의다. 4·3은 이렇듯 유족과 학계, 시민사회단체, 정치권 등 제주 사회가 합심해 특별법을 만들어내고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이뤄 온 제주 현대사의 비극이다. 특별법상 정의에서도 보듯 ‘무력충돌’과 ‘진압’, ‘주민 희생’이 4·3의 ‘비극’을 함축적으로 나타낸다. 제주지역 방송과 신문 등 다양한 매체도 지금껏 ‘비극’에 주목해 왔다. 4·3으로 얼마나 고통을 겪었는지, 어떤 트라우마로 남았는지, 피해 회복은 어떻게 되고 있는지 등등. 4·3 73주년 특집 다큐 ‘섬의 기억’은 이러한 경향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고통과 아픔, 비극은 오랜 보도와 홍보로 어느 정도 알려져 있으니 다른 각도에서 접근해보자고. 그래서 ‘섬의 기억’은 4·3의 발발 원인에 초점을 맞췄다.

◇과거의 기억
고백하자면, 나는 ‘제주사람’이 아니다. 제주에서 나고 자랐지만, 부모님은 제주 표현으로 ‘육지사람’이다. 선대로부터 전해 들은 4·3에 대한 얘기가 단 한 마디도 없었다는 뜻이다. 부끄럽지만 기자 생활을 11년째 하며 4·3을 겉핥기로만 알았지 깊숙이 알지도 못했다. 4·3에 대한 정서는 물론 지식, 정보가 부족한 상황에서 시작된 취재. 의지할 것이라고는 자료뿐이었다. 선배 기자, 연구자들이 4·3을 연구하고 저술한 자료를 샅샅이 뒤졌다. 책상 한켠에 관련 서적과 논문을 쌓아놓고 틈나는 대로 탐독했다. 1947년 전후 제주시대를 보도한 옛 신문과 당시 제주 통치를 맡은 미군정의 보고서도 원문을 찾아 번역했다. 어떤 취재든 자료 수집과 정리가 잘 되면 절반은 성공이라고 믿어왔다. 이번 다큐를 취재할 때도 같은 생각이었다. 자료를 찾아 읽고 정리하는 데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한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탄탄한 자료는 다큐 제작에 도움은 될지언정 완성할 수 없다는 사실을 ‘다큐 초보’는 뒤늦게 깨달았다. 현재의 기억에 맞닥뜨린 시점에서다.

 

 

◇현재의 기억
방송 다큐는 영상 구성물이다. 자연, 동물, 건물 등 다양한 소재가 있겠지만 4·3 다큐는 사건 속 인물이 주인공이었다. 현재를 살아가면서 4·3의 기억을 가진 어르신을 섭외해야 했다. 그러나 시간은 우리 편이 아니었다. 4·3이 발발한 지 73년. 취재에 도움 주신 양유길 할머니의 표현을 빌리자면 ‘강산이 변해도 거의 여덟 번 변한’ 시간이다. 당시의 기억을 또렷이 간직한 채 객관적인 증언이 가능하려면 73년 전에는 적어도 초등학생 고학년 또는 중학생이어야 했다. ‘이런 내용의 다큐를 5년 전, 아니 3년 전에만 했었더라면’이라는 후회하기를 여러 차례. 어렵사리 섭외해 인터뷰해도 객관적인 내용을 추려내는 게 문제였다. 본인이 겪은 4·3이 그들에게는 4·3의 전부였고 곧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4·3 발발 원인을 찾는 취재를 시작은 했지만 어떤 주제를 담을지, 어떤 의미를 전달할지 쉽사리 정하지 못했던 그때 송영호 할아버지의 한 마디가 머릿속을 울렸다.

 


◇미래의 기억
“용서는 하되, 잊지는 말아야 돼.” 정보성이 짙은 다큐에 의미를 불어 넣어준 한 마디. 열두 음절에 불과하지만 내포한 의미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깊었다. 송 할아버지는 4·3의 도화선인 1947년 3.1 발포사건 희생자의 유족이다. 당시 미군정 경찰이 쏜 총탄에 아버지를 여의고 70년 넘게 사무친 기억을 안고 현재를 살아왔다. 그런 그가 ‘용서는 가능하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잊지는 말자’고 했다. ‘방송을 통해 기억을 남길 수 있게 됐으니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말에는 가슴이 먹먹했다. 과거의 기억은 현재를 살다가 미래로 이어진다. 4·3도 그렇다. 작은 섬에서 일어난 비극적인 역사가 현재에 이르러 올바로 정의 내려지고 미래에는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게 될 것이다. 다큐 ‘섬의 기억’이 그러한 역사의 흐름에 작게나마 도움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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