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가 수신료 인상을 위한 형식적인 절차를 대부분 끝마쳤다. 지난 1월27일 KBS 이사회에 현 월 2500원인 수신료를 월 3840원으로 인상하는 수신료 조정안을 제출한 KBS는 지난 14일 전국 시청자위원회를 열고, 28일엔 공청회를 개최해 여론을 수렴했다. 이제 이사회 의결만 남은 상황. 하지만 수신료 인상에 여론이 냉랭한 만큼 KBS는 숙의 토론 방식의 공론화 과정을 ‘추가’하기로 하고, 다음 달 22~23일 국민 의견조사를 시행하기로 했다. 그 결과를 반영해 이사회가 수신료 인상 금액을 확정해 의결하면 공은 방송통신위원회와 국회로 넘어간다.
“잘 하면 올려줄게” vs “올려주면 잘할게”
앞서 2007년, 2011년, 2014년 세 차례 수신료를 올리려다 실패한 KBS는 현 정부여당 체제에서 수신료 인상을 시도하는 게 그나마 가능성 있다고 판단한 듯하다. 그런데 지금은 코로나19라는 전대미문의 팬데믹 상황이다. 따라서 많은 국민은 물론, 수신료 인상에 호의적이던 여당 의원들마저 이렇게 묻는다. “왜 하필 지금?”
KBS는 오히려 “지금이어야 한다”고 답한다. 양승동 KBS 사장은 28일 공청회 인사말을 통해 “지금이야말로 급격한 미디어 환경변화에 맞는 KBS의 역할과 정체성을 재정립하고 미래의 공영방송 모델을 찾아야 하는 시점이라고 판단했다”고 밝혔다. 재난이 일상화되면서 공영방송의 역할은 절실해지고 요구되는 공적책무도 많아졌는데, 미디어 환경변화와 40년간 동결된 수신료로 인해 재원은 쪼들리고 있다는 분석이다.
그래서 “‘공영방송과 KBS의 미래’를 주제로 십여 분의 언론학계와 회계 분야 전문가들이 참여한 연구를 토대로” 수신료 1340원 인상안을 도출해냈는데, 이에 대해서도 상반된 시각이 다수다. 수신료 납부자인 국민이 보기엔 코로나19 상황에서 50%가 넘는 인상 폭이 ‘크다’고 생각되는 반면, 수신료 인상의 당위성을 주장하는 쪽에선 오히려 ‘적다’는 의견이 있다. 이원 인천가톨릭대 교수는 이를 “딜레마”로 표현했다.
KBS가 수신료 인상을 시도해 온 지난 역사도 이와 다르지 않았다. 박성우 우송대 교수는 “거칠게 요약하면 ‘잘하면 올려줄게’, ‘올려주면 잘할게’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하는 소모적 논쟁의 반복이었다”고 꼬집었다.
수신료에 관한 동상이몽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이날 직접 발제를 맡은 임병걸 부사장은 KBS가 ‘현재’ 이행 중인 공적책무를 A4 용지 8페이지 분량으로 요약해서 설명했다. 문제는 국민 다수가 KBS의 이런 역할을 ‘체감’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 KBS는 또 수신료 인상 시엔 ‘5대 목표, 12대 과제, 57개 사업’을 진행해 공적책무를 확대하겠다고 밝혔다. 여기엔 ‘재난 데이터 허브’ 구축, ‘팩트체크K’ 센터 설치 운영 등이 포함됐는데, 양홍석 변호사는 “이건 당연히 해야 하는 건데 수신료 안 올려주면 못 하겠다는 거냐”라며 “(이런 계획들은) 수신료 인상의 근거가 될 수 없다”고 지적했다.
문제의 본질은 수신료 납부자이자 KBS의 주인이라는 시청자, 즉 국민이 보이지 않는다는 데 있다. 박성우 교수는 “수신료 지불자와 징수자, 집행자, 그리고 정책을 만드는 자 모두가 각각 분리돼 소통이 불가하도록 배치됐고, 무엇보다 중요한 시청자는 현실과 담론에서 모두 소외되는 이중 소외 에 처해 있다”고 지적했다. 수신료 결정과 집행 과정이 KBS와 방통위, 국회 같은 기관에만 맡겨져 있는 까닭에 많은 국민이 공영방송을 공공재로 인식하기보다 “나는 KBS를 보지도 않는데 왜 수신료를 내야 하느냐”고 항변하는 상황을 맞게 됐다. KBS가 마련한 수신료 인상을 전제로 한 공적책무 이행 계획 역시 시청자 의견을 충분히 반영했다고 보기 어렵고, 그래서 공허하다는 인상을 준다.
양홍석 변호사는 “과거 세 차례 실패했을 때와 동일한 방식을 그대로 반복한다는 것은 실망스럽다”며 “왜 40년 동안 인상 안 됐나를 고민해야지 40년 전에 2500원이었으니 단순히 올려야 한다는 식으로 접근해선 안 된다”고 지적했다. 그는 “2021년의 KBS는 어떤 사명을 갖고 있는지, 1981년 콘텐츠를 독점하던 시기 KBS의 역할과는 다른 방식으로 접근해줬으면 한다”면서 “지금 사람들은 KBS를 안 본다. 굳이 안 봐도 다른 매체를 통해 수요를 충족하고 오히려 만족하고 있다. 수신료 인상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면 다른 방식의 설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시청자도, EBS도 소외된 KBS‘만’의 수신료 인상안
이날 EBS 수신료 배분율 문제가 반복해서 거론된 것도 같은 맥락에서 봐야 한다. KBS는 수신료 인상 시 EBS 배분율을 현 3%에서 5%로 올려 총액 기준 2.7배 인상한다고 밝혔지만, EBS측은 약 18% 정도는 배분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날 공청회에 참석한 토론자 다수도 EBS에 대한 배분이 적을 뿐만 아니라 합리적인 산정으로 볼 수 없다고 지적했다. EBS 역시 수신료의 사용 주체고, 재난 상황에서 온라인 개학 등 많은 책임을 맡아야 했음에도 수신료 액수 산정 논의 과정에서 사실상 제외됐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임병걸 부사장은 “EBS 입장에선 충분해 보이지 않겠지만 방송광고 결합판매 지원이나 UHD 송신시설 지원 등을 다 포함하면 800억원 정도가 된다. EBS 광고 재원이 250억원 정도인데, (배분율을) 5%로 올리면 그 정도는 수신료 재원으로 충분히 커버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면서 “EBS 지원 금액을 올리면 수신료 인상액에 다시 영향을 주지 않을까 하는 고민도 있었다”고 설명했다.
이날 공청회에선 수신료 인상의 전제조건으로 수신료 지불자(국민)와 사용자(KBS, EBS)가 참여하는 수신료 대표 기구의 설치, 물가연동제 도입, 소액씩 단계적 인상, 그리고 국민에게만 부담을 물리지 말고 공영방송 재원 감소로 인해 상대적으로 수혜를 입는 유료매체나 플랫폼 기업 등에 대가를 부담토록 하는 방안 등도 제시됐다. 심영섭 경희사이버대 겸임교수는 한국전력이 수신료 위탁 징수 수수료로 EBS의 2배인 6.15%를 받는 게 적절치 않다며 한전 수수료 상한선을 15%로 규정한 방송법 시행령을 고쳐 최대 3% 수준으로 제한하고 그만큼 EBS에 지원하는 방안을 제안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임 부사장은 “20년 동안 변하지 않는 미디어 법안 전반을 손봐야 한다는 사회적 요구가 있는데 현 정부 4년이 지나도록 특별히 개혁한 게 없다. 수신료 산정위원회나 거버넌스 문제, 공정성을 위한 제도적 장치 등을 한꺼번에 논의하기엔 시간이 없고 기대하기도 어렵다고 생각했다”며 법 제도 개선과의 병행 처리에 대해선 회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는 “가장 이상적인 것은 통신과 글로벌 플랫폼을 아우르는 법이 먼저 만들어지고 하부 논의로 수신료나 공적 지원에 대한 논의가 이뤄지는 것인데, 정치적 환경이 그걸 기대하기엔 요원하기 때문에 현행법상 가능한 수신료만 올린 것”이라며 “이번에 수신료 조정안을 내면서 그동안 KBS가 무엇을 잘못했나 반성했고, 숙의적 민주주의 공론화를 통해 제기된 고견들을 청취해서 다양한 방식으로 개선하고 정책이나 콘텐츠에 반영하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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