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가 범람한다. 양성평등교육진흥원의 교육 콘텐츠, 재보궐선거 이후 ‘이남자’(20대 남자) 현상, 군 가산점 부활 등에 대해 ‘젠더 갈등’이란 점을 부각하고 일부 온라인 커뮤니티의 목소리를 고스란히 담아낸 기사들이다. 기원도 의미도 불분명한 단어를 두고 ‘남성 혐오’란 주장이 튀어나오고, 해당 단어를 사용한 웹툰 등에 이른바 ‘별점 테러’를 하는 일이 벌어지면서 이 주장을 그대로 담아 “젠더갈등이 격화하고 있다”거나 “남혐논란이 있다”는 기사도 앞다퉈 나온다.
위근우 칼럼니스트는 최근 경향신문 칼럼에서 ‘웹툰 별점 테러’ 등 일련의 현상에 대해 “이번 악플 및 별점 테러는 매우 많은 유저가 적극적이고 일사불란하게 뛰어드는 것과 별개로 사건의 인과를 찾기 어렵다. 공격 대상의 선별도 무차별적”이라고 지적했다. 특히 이들의 주장에 마치 “사회적 승인이라도 떨어진 것”처럼 공격이 발생하는데 그 원인 중 하나로 여야 정치인들의 “무책임한 구애”를 꼽는다. 무엇이 혐오이고 무엇이 차별인지 식별조차 못하는 정치인들의 발언이 이런 행위를 적극 옹호해준 셈이란 얘기다.
사실 “사회적 승인”의 주체는 또 있다. 언론이다. 그동안 많은 언론은 이런 현상을 ‘젠더갈등’이란 말로 손쉽게 치환하고, ‘VS’를 사용해 양쪽을 등치시키는 방식으로 다뤄왔다. 하지만 이런 보도가 과연 최선일까란 물음이 남는다. 김수아 서울대 교수는 2018년 겨울 <황해문화>에 게재한 ‘젠더정치의 미디어 프레임, 그 페미니즘’이란 글에서 언론이 페미니즘과 젠더 이슈를 어떻게 문제적으로 다루고 있는지, “페미니즘=남성혐오”란 잘못된 프레임을 어떻게 만들어냈는지 짚는다. 더 많은 이들과 함께 읽고 싶어 글의 일부를 옮겨본다.
“언론은 통상 중립적인 태도를 취한다는 명목으로 논란의 여지가 있는 문제에 대해 비슷한 비중을 부여하면서 저널리즘의 책임을 다했다고 주장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언론의 객관적 보도 관행이야말로 성차별의 현실을 가릴 수 있는 이데올로기적 역할을 한다. 뉴스에서 타인의 해석을 거치지 않은 사실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균등한 힘을 가진 주체를 상정하고 이를 같은 비중으로 보도하는 것이 객관보도이며, 이는 이미 존재하는 힘의 불균형을 가리는 역할을 한다. 따라서 균형의 언어를 통해 보도되는 현실이 종국적으로 남성 중심적 가치를 옹호하게 되는 것이 현재의 객관적 보도 관행의 결과라는 것이다.”
김 교수는 이 글에서 특히 “단순화된 전제, 갈등 중심의 보도를 반복하면서 갈등의 윤리성을 판단하는 주체를 자처하는 보수언론은 주로 남성 중심의 관점에 서서 새롭게 등장한 여성의 목소리를 일탈로 취급”한 결과 “구조적 성차별로 인한 다양한 문제들이 다루어지지 못하고 있다”고 봤다. 그러면서 “무엇보다 객관보도의 형식으로 갈등을 조장하는 것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지적했다.
판단·검증·고민이 실종된 채 받아쓰기와 클릭수에 매몰된 기사가 나온다는 비판이 어제오늘 일은 아니지만, 딱히 개선되지도 않았다. 최근 젠더이슈에 대해 무분별하게 쏟아지는 기사들을 보며 언론이 공적 담론의 장을 만들어내기는커녕 ‘객관’이란 표피를 빌려 적극적으로 차별과 혐오를 재생산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기사는 현실과 동떨어져서 존재할 수 없기에, 현실의 불균형을 어떤 맥락으로 담아낼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수반돼야 비로소 ‘객관적인 보도’가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더불어 무엇이 혐오고 무엇이 차별인지 계속 되묻고 성찰해야 한다. 언론이 ‘언론’으로서 공적인 책임을 다하려 한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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