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펜 잡았던 손… 기관차 운전대 잡고 으랏차!

[기자 그 후] (29) 최철호 미 WMATA 기관사 (전 서울신문 워싱턴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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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히 열차를 모는 것을 떠나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도착하기 위해 운행 중 발생하는 부수적 문제점들을 숙지하고, 대처해야 해요. 열차의 문이 작동하지 않는 것부터 시작해 브레이크가 잘 풀리지 않는다거나 화재, 강도 등 열차 안팎의 사고까지 다양한 문제점들이 생길 수 있어요. 기관차라는 한 작은 사회를 책임진다는 의식이 있죠.”

 

지난 1986년 서울신문에 입사해 1998년 워싱턴 특파원 부임 이후 미국에 정착해 30년 가까이 기자로 살았던 최철호 전 기자는 지난 2015년 워싱턴 DC 지하철 기관사에 도전했다. 현재 그는 미 WMATA(Washington Metropolitan Area Transportation Authority) 소속 5년 차 기관사로 활동하고 있다.

최철호 기관사는 처음으로 기관차를 몰던 느낌을 잊을 수 없다. 6개월간의 훈련을 마친 직후 첫 운행에 나섰는데 속도감이 의외로 커 놀랐다. 정차역마다 지침은 다르지만, 열차 속도가 50마일(시속 80km)이 넘어가니 기관차가 마치 휙 날아갈 것 같았다. 얼마나 긴장했던지 기관차를 움직이는 마스터 컨트롤을 너무 세게 잡아 손에 경련이 일었고, 나중엔 손가락을 오므리고 펴기도 어려웠다. WMATA(Washington Metropolitan Area Transportation Authority) 소속인 그는 이제 5년 차 기관사가 돼 승객의 안전을 책임지며 워싱턴 DC의 거리와 지하를 누비고 있다.


1986년 서울신문에 입사한 그는 워싱턴 DC 특파원으로 부임한 이후 미국에 정착해 지난 2015년까지 기자로 살았다. 특파원 부임 시기인 1998년, 한국은 한창 IMF 외환위기를 겪고 있었다. 급여가 30% 가까이 줄어들 정도였고, 이름을 떨치던 선후배 기자들도 줄줄이 회사를 나갔다. 미국에 있던 그는 한국이 IMF 이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고, 특파원 임기가 끝나도 가족들과 한국에 돌아갈 자신이 없었다. 그 없던 시절에도 한국에선 과외 붐이 일었다. 아이들이 영어라도 마음껏 배워 나중에라도 써먹을 수 있게 이곳에 정착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임기를 마칠 무렵 마침 현지 한인 방송국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왔고, 앵커로 활동하게 됐다. 이후 그는 뉴시스 워싱턴 DC 특파원, 워싱턴 중앙일보에서 선임기자, 편집국장 등을 역임했다.

 

기관사 트레이닝 당시 최철호 기관사가 교실에서 동기생들과 함께한 모습. "모두 연령과 경력 등을 초월해 기관사로서 생을 선택한 이들"이라고 최 기관사는 설명했다.

30년 가까이 기자로 살다 은퇴할 시기가 왔지만, 그는 더 일하고 싶었다. 다시 말단 기자로 일할 자신이 있었지만 좁은 한인 사회에선 계속 나이가 걸렸다. “그래, 나를 환영하지 않는 곳은 깨끗이 접자”고 결심했고, 의료보험을 계속 가질 수 있는 직장을 찾다 열차 기관사 공고가 눈에 띄었다. 관련 학과, 기술, 경험이 없어도 입사 시험만 통과하면 6개월 동안 훈련을 시켜준다는 공고였다. 기관사라는 새로운 도전이 두렵지 않았냐는 질문에 “30년 동안 그 어려운 기자 일을 해냈는데 기차 운전하는 게 그것보다 어렵겠냐는 오기가 생겼다”는 명쾌한 답이 돌아왔다.


최 기관사는 “일단 기자 일이 피곤하지 않나. 기자 생활하면서 정신적으로 시달리는 부분도 있었는데 다른 거 신경 안 쓰고, 나만 열심히 하면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고, 거기서 일의 재미, 성취감을 찾을 수 있다고 봤다”며 “실제로 동기 중엔 나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도 있고, 장애인도 있다. 누구에게나 동등한 기회를 주고, 위계 없이 사람들의 능력을 빨리 캐치해 적재적소에 투입하는 효율적인 면이 이 사회의 장점”이라고 말했다.


최 기관사가 소속해 있는 WMATA는 워싱턴 DC와 메릴랜드, 버지니아 3개의 주 정부가 합작해 지하철, 대중버스를 관할하는 준 연방 기관이다. 필기시험, 인성시험, 면접을 보고 경력과 거주지, 인물관계 등 “빡빡한” 10년 치 신원조회 과정을 거쳐 그는 WMATA 트레이닝 기관에 들어갔다. 그는 “6개월간 트레이닝을 할 때는 밤잠 못 잘 정도로 힘들었다. 일주일 두세 번 씩 시험을 보는데 두 번의 기회밖에 없었다”며 “특히 기차 매커니즘같이 기술적인 부분은 처음엔 잘 모르니 긴장의 연속이었다”고 회상했다.


그렇게 펜 대신 열차 운전대를 잡은 그는 예상보다 기관사 일이 ‘전진’, ‘멈춤’만 있는 게 아닌, 여러 상황마다 대처해야 할 일이 많다는 걸 느꼈다. 역시 모든 일은 다 쉽지 않았다. 보람을 느낄 때도 있지만, 신호기가 고장 나 골치 아픈 일도 생기고, 다행히 오늘은 잘 지나가는 일도 있는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소속 기관에선 전 직종과 관련된 홍보업무직을 권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이 일이 좋아 계속 기관사로 일하고 싶어 거절하기도 했다.


최 기관사는 “이곳의 장점이 정년이 없다는 거다. 미국 사람들은 사회 보장 기금에서 은퇴 자격 점수가 되면 나머지 여생을 여유롭게 보내는 게 인생의 목표인데 저는 할 수 있으면 계속 일을 하고 싶다”며 “교통 분야에 발을 들였으니 도시공학적, 교통공학 측면에서 심화시켜 영역을 넓혀가는 것도 생각하고 있다. 향후 한국, 미국 간 지하철 업무 체계를 교류하는 데도 기여하고 싶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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