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H 직원들의 부동산 부정 매입 의혹에 대한 경찰 수사에 국민적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수사 상황은 거의 매일 언론에 보도되고 있다. 경찰의 국가수사본부 역시 수사 과정을 적극적으로 알리고 있다. 3월10일 국가수사본부는 기자들에게 이런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어제(3. 9.) LH직원의 자택 압수수색시 토지개발 관련 지도를 압수하였고, 자료의 출처 및 투기 관련성은 수사중임.” 이에 앞서 LH 본사 압수수색이 이뤄지기기도 전에 경찰이 신청한 압수수색 영장을 법원이 심사하고 있다는 소식을 수십 곳의 언론사가 보도한 적도 있다.
수사 상황이 생중계되다시피 보도되는 것은 LH 사건뿐만이 아니다. 구미 3세 어린이 사망 사건에 대한 수사 상황도 거의 매일 기사로 나오고 있다. 3월14일 연합뉴스는 “사건을 수사 중인 경북 구미경찰서에 따르면 A씨가 참고인 조사에서 아내가 임신과 출산을 한 사실은 전혀 알지 못했다고 진술했다"라고 보도했다. 참고인이 경찰에 진술한 내용이 그대로 언론에 보도된 것이다. ”숨진 아동이 (친모로 알려진 인물의) 친자일 확률이 99.9%“라는 국립과학수사연구원 분석 결과가 인터뷰 형식으로 보도되기도 했다.
그러나 LH 사건과 구미 어린이 사건 수사팀 관계자들에 대해 피의사실 공표 금지 원칙을 위반했다고 비판하는 목소리는 듣기 어렵다. 이처럼 스스럼없이 수사 상황을 언론에 알리는 일이 대전지검의 월성원전 폐쇄 의혹 수사 과정에서 벌어졌다고 가정해보자. 아마도 피의사실 공표 금지 규정을 위반한 검찰 관계자를 징계하고 수사하라는 요구가 빗발쳤을 것이다. 2017년과 2018년에 검찰이 적폐청산과 사법농단 수사를 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피의사실 공표에 대해서는 침묵했다가, 2019년 조국 전 장관 사건이 터지자 ‘피의사실 공표는 반문명적 행태’라고 목소리를 높였던 ‘진보적 지식인’들 역시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것이다.
수사 기관의 무차별적 피의사실 공표를 옹호하는 것이 아니다. 또, 보도 가치가 있는 피의사실을 기자가 보도하는 것은 수사기관의 피의사실 공표 금지 의무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행위이고, 알 권리를 위해 마땅히 보장되어야 하는 활동이라고 생각한다. 문제는 이중기준이다. 적폐청산과 사법농단 수사 과정에서의 피의사실 공표는 ‘좋은 피의사실 공표’였다가, 조국 전 장관 수사 과정에서의 ‘나쁜 피의사실 공표’가 되고, 다시 LH 수사가 시작되자 ‘좋은 피의사실 공표’가 될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나 LH 직원들은 ‘나쁜 사람’이니까 피의사실 공표를 해도 되고, 조국 전 장관은 ‘나쁜 사람’이 아니니까 피의사실 공표를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수사가 진행되는 상황에서는 누가 ‘나쁜 사람’인지 객관적인 기준에 입각해 판단하기는 어렵다. 설령 ‘나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좋은 사람’보다 기본권을 침해받아야 하는 것도 아니다. 이런 주장은 ‘우리 편’에 대한 피의사실 공표는 범죄이고, ‘상대 편’에 대한 피의사실 공표는 공익적 활동이라는 폭력적 진영논리에 불과하다.
2019년 조국 사태 이후 법무부가 ‘형사사건 공개 금지 등에 관한 규정’을 만들었을 때, 나는 알 권리와의 조화를 고려하지 않은 피의사실 공표 금지 규정은 권력을 가진 ‘우리 편’만 보호하는 도구로 전락할 것이라고 여러 차례 경고했다. 1년이 조금 넘는 시간이 흘렀을 뿐이지만 당시의 우려는 그대로 현실이 됐다. 이런 식이라면 앞으로 누가 권력을 잡든 피의사실 공표 금지 원칙은 권력자들만을 보호하는 도구로만 활용될 것이다. 피의사실 공표와 보도에 대해 정파적이지 않으면서도 현실적인 논의가 지금이라도 시작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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