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잘 지내시는지요. 서강대 장은미 박사님과 함께 맛있는 중국요리를 사주셨던 날, 그리고 꽤 뜨거웠던 유자차를 식혀 마셨던 날이 떠오릅니다. 2019년 여름이었고, 날이 아주 화창했던 광화문이었습니다. 컵에는 노랗고 예쁜 꽃무늬가 그려져 있었는데, 그날 대화는 조금 우중충했지요. 한국 언론에 관한 고민, 유학 시절의 어려움, 저널리즘과 젠더 이슈를 주제로 다룬 연구 내용을 대화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핀란드 미디어리터러시 교육에 관해서도 여러 질문을 하셨는데, 제대로 답변을 드렸는지 잘 떠오르지 않습니다.
선생님, 위에서도 늘 뉴스를 보시지요? 3월8일 여성의 날을 맞이해 몇몇 기사를 읽다가 선생님 연구에 넣을 해외 자료를 조사했던 기억이 났습니다. 한국언론진흥재단에서 지원한 ‘젠더 이슈 보도 실태 및 개선방안 연구’(2019)였지요. 제게 핀란드 언론의 젠더 이슈 보도 실태와 성 평등 교육 현황을 알아봐 달라 하셨을 때 그렇게 큰 공부가 될 줄은 모르고 참여했습니다. 방법을 잘 몰라 조사 내용 일부를 ‘개조식’으로 정리해서 보내기도 했는데, 선생님께서 얼마나 당혹스러워하셨을지요? 깜냥이 되지 않는 과제를 덜컥 맡아 주변에 폐 끼치는 일은 지금도 종종 하고 있습니다.
선생님, 얼마 전인 3월3일, 변희수 전 육군 하사가 세상을 등졌습니다. 성전환 수술을 받은 뒤에도 끝까지 군 복무를 마치고 싶다던 그에게, 육군과 국방부는 강제 전역 판정을 내리고야 말았습니다. 군은, 삶을 만들어가는 용기와 애국심을 가졌던 그를 ‘심신장애 전역 대상’이라는 말로밖에 규정할 수 없었을까요? 언론도 사회적 타살에 가담했습니다. 그를 둘러싼 화제성에는 주목했지만, 차별과 불평등에 적극적으로 맞서진 않았습니다. 각 언론 조직에 더 다양한 구성원이 있다면, 그리하여 기자회견으로 모습을 드러낸 그의 목소리를 확성하고 지지하는 기사가 더 나왔다면 어땠을지요. 선생님께서 이곳에 계셨다면, ‘다시 보는 미디어와 젠더’(2013, 이화여자대학교출판문화원)를 함께 내신 이나영, 최이숙 선생님 등과 이런 문제를 짚어보는 자리를 만드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젠더 이슈 보도 실태’ 연구에서 소개했던 혐오 방지를 위한 정책적 개입, 영국 BBC와 핀란드 Yle 50:50 원칙, 실제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는 미디어 ‘과소재현’ 문제를 다시 읽어봅니다. BBC 연간 계획에서는 장애(disabled), 소수자(LGBTQ+), 비백인(BAME) 직원의 관리자 및 이사회 참여 비율을 구체적으로 설정했었네요. 프랑스는 시청각최고위원회(CSA) 활동 내용으로 스테레오타입, 성적편견, 존엄성 훼손 이미지, 여성 대상 폭력 등을 감시하도록 정하고, 2019~2022년 평등 로드맵에 ‘다양성-평등’ 인증제 실시, 광고 내 성차별적 스테레오타입 근절 헌장 체결, 유튜브 영상 및 뮤직비디오 다양성 연구 조사 등을 포함했습니다.
3월8일 기사를 훑어봤습니다. 고용 위기에 직면한 여성 노동자 실태(한겨레), 성소수자 보도 문제점(기자협회보), 미디어를 위한 젠더 균형 가이드(미디어스), 세계 미디어 모니터링 프로젝트 결과(여성신문)를 접했습니다. 연구 보고서에 넣으며 참 신선하다 느꼈던 스웨덴의 인터뷰이 성별 모니터링 프로그램 ‘프로그노시스’(Prognosis)나 “가장 중요한 건, 급하다고 해서 친한 (남성) 전문가에게 바로 인터뷰하지 않는 것이다”라던 깔레 실퍼베르(Kalle Silfverberg) 헬싱긴 사노맛 기자의 말도 더 적극적으로 소개할 걸 그랬습니다. “평등이란 의식적인 노력 없이 바뀌지 않는 중요한 이슈”라던 Yle 편집장 리까 라이사넨의 말도 우리가 더 노력해야 하는 이유를 새삼스레 떠올리게 됩니다.
선생님, 2019년 연구가 함께하는 마지막 기회가 될 줄은 몰랐습니다. 어려웠던 유학 시절 이야기를 좀 더 되새겨야 했을까요. 그간 저는 개인적으로도 길을 잃었고, 미디어리터러시 공부에서도 헤매고 있습니다. 겨우 어깨를 펴고 편지를 써서 보냅니다. 잠시나마 시간을 나눠 주셨던 선생님께 이 칼럼으로 안부 인사를 드립니다. 오늘도 뉴스를 보며 걷고 계실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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