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미국 텍사스에선 126년 만의 한파가 닥쳤고, 미국 본토의 73%가 눈에 덮였다. 코로나19로 급증한 플라스틱 폐기물 처리 문제에 전 세계는 골머리를 앓고 있고, 국내에서도 지난해 여름 관측 사상 역대 최장기 장마를 경험했다. 사람들은 먼 나라 북극곰의 문제로만 생각한 기후변화 현상이 일상 속으로 파고들었음을 직감하며 기후변화 문제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의 ‘Climate Capital’(기후 자본) 섹션 신설은 독자들의 기후변화에 대한 높아진 관심에 맞춘 결과다. 영국 미디어 전문 매체 ‘저널리즘’ 보도에 따르면 지난해 8월 FT가 글로벌 독자를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응답자 중 4분의 3 이상이 기후변화와 관련된 보도 주제를 ‘극히(extremely)’ 또는 ‘매우(very)’ 중요하다고 대답한 것으로 나타났다. 설문 조사를 바탕으로 지난 2월 FT는 온라인 웹사이트에 “비즈니스, 경제적 관점에서 기후변화에 대한 최신 정보를 제공”하는 ‘기후 자본’ 섹션을 출범시켰다. 레니 카플란(Renee Kaplan) FT 디지털 책임자는 저널리즘과 인터뷰에서 “기존의 기후변화 기사에서 독자의 참여도는 매우 높았고, 이는 매년 증가하고 있다. 기후변화 관련 주제는 전체 기사 평균 독자 참여 비율보다 높은 편”이라고 밝혔다.
기후변화가 전 세계적 이슈로 부상하면서 국내 언론사들도 기후변화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있다. 한국언론진흥재단의 뉴스빅데이터 분석 시스템 ‘빅카인즈’에서 ‘기후변화’를 키워드로 검색한 결과 54개 언론사에서 보도한 기후변화 관련 기사는 지난해 총 1만5717건으로 2019년(1만1688건)에 비해 4000여건 증가했다.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의 2050년 탄소중립(온실가스 순 배출량 0) 선언, 급증한 전기차 시장, 정부의 그린뉴딜 정책 등으로 언론이 다루는 기후변화 분야도 환경에서 정책, 산업, 테크 등으로 다양해졌다.
기후위기, 가까운 미래로 다가와...
밀레니얼 세대엔 사실상 당면과제
기후변화 전담팀을 구성해 기후위기·환경 문제를 주요 의제로 설정, 보도의 전문성을 강화하려는 뉴스룸 내 움직임도 포착된다. 한겨레는 지난해 4월 국내 종합일간지로는 처음으로 기후변화팀을 결성해 주목받았다. 지난해 12월 한국일보는 기후대응팀을 신설해 <제로웨이스트 실험실> 시리즈를 이어나가고 있다. KBS 재난방송센터 취재팀도 기존 기상전문기자 3명에서 기자 2명을 추가로 보강해 지난해부터 기후위기 기획 보도를 꾸준히 선보이고 있다.
지난해 12월 기후변화로 인한 국내 피해 사례 5가지를 심층 취재한 <라스트 포레스트> 기획으로 호평을 받은 헤럴드경제는 지난 4일 헤럴드경제·코리아헤럴드 편집국, 디지털콘텐츠국, 헤럴드 사업국이 협력하는 ‘H.eco’(헤코) 브랜드를 론칭했다. 국 간의 경계를 없애고 전사적인 차원에서 기후변화 콘텐츠 생산과 캠페인을 함께 진행하는 일환이다.
지난해 10월 MBC는 지구환경팀을 구성해 <집중취재M-온실가스 뿜어내는 하마…“친환경 석탄은 없다”> 등 의미있는 기획을 선보였지만, 올해 코로나19 이슈 대응을 위해 지구환경팀을 사회정책팀으로 통합했다.
기후변화 전담팀 기자들은 높아진 ‘기후변화 뉴스 수요’를 체감하고 있다고 한목소리를 냈다. <라스트 포레스트>를 기획한 이정아 헤럴드경제 디지털콘텐츠국 기자는 “당시 포털 많이 본 뉴스 순위에서 <라스트 포레스트> 기사가 1위에 올랐는데 BTS가 수상했다는 기사를 이길 정도였다. 시리즈 전체 댓글 수는 3000개 정도였다. 중학교 학습 자료로 이용할 수 있느냐는 문의가 오기도 했다”며 “처음 기획할 때만 해도 기후변화에 대해 사람들이 행동하고, 목소리를 내줄까 생각했는데 예상하지 못했던 반응이었다. 생각보다 사람들이 기후 문제를 민감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고 말했다.
기후위기 콘텐츠는 기성 언론이 MZ세대(밀레니얼세대+Z세대) 독자를 확보할 수 있는 가능성도 보여준다. 가까운 미래로 다가온 기후위기가 MZ세대에겐 당면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신혜정 한국일보 기후대응팀 기자는 “<제로웨이스트 실험실> 기사와 영상을 보는 독자 연령대가 2030 세대로 특정돼 있을 정도로 관심이 정말 확고하다. 환경 문제를 학교에서 배우고 자란 세대가 밀레니얼 이후이지 않을까 싶다. 이들이 환경 문제를 인식하고, 뉴스 소비자의 주축이 되면서 기후변화 보도의 관심이 커지고 있다”고 말했다.
신규 독자 확보할 가능성 엿보여,
해외선 독자 참여도 매년 증가세
“‘북극곰 저널리즘’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언론에서는 여전히 흥미 위주의 보도를 하는 경우가 많다. 기후위기를 먼 나라 문제로 치부해버리고 정작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관심이 없어 보인다.”
신방실 KBS 기상전문기자는 지난 2일부터 미래 세대가 기후 관련 교육을 충분히 받고 있는지 점검한 <기후의 위기, 침묵하는 교육> 시리즈를 보도하고 있다. 그는 해당 보도에서 “세계과학자연합이 발표한 기후변화 완화를 위한 행동지침을 보면 이제 개인이 할 수 있는 건 채식 정도뿐이고, 대부분 국가 정책이나 생산과 소비 구조 등 경제 전반을 바꿔야 하는 일들”이라고 설명했다. 언론이 선언적이고 거대담론 위주의 기후변화 보도에서 벗어나 주변의 이야기에 집중하고, 더 나아가 실현할 수 있는 구체적인 대안에 접근해야 한다는 지적과 맥을 같이 한다.
신방실 기자는 “기후위기와 교육문제는 보통 메인 뉴스에서 길게 다루지 않는 흥미 없어 하는 주제지만 공영방송이니까 할 수 있는 기획이라고 생각한다”며 “올 한해 기후위기의 최대 피해자인 사회, 경제적 약자들에 대한 보도를 이어갈 예정”이라고 말했다.
언론사들의 기후변화 콘텐츠 차별화 시도 또한 이어지고 있다. 한국일보 기후대응팀의 <제로웨이스트 실험실>은 기후위기를 일회용 플라스틱 처리라는 일상 문제에 접목한 콘텐츠다. 신혜정 한국일보 기후대응팀 기자는 “처음 기후대응팀이 출범하며 염두에 둔 건 기사가 독자들의 일상에 가까워야 한다는 점이었다. 그래야 기사가 읽히고, 기후위기를 심각하게 생각할 수 있다고 봤다”며 “나아가 재활용 문제는 소비자가 아닌 플라스틱 생산자, 정부 정책이 해결해야 한다는 방향으로 기획을 잡았다”고 말했다.
경향신문 <기후변화의 증인들>, 헤럴드경제의 <라스트 포레스트>는 전국 곳곳의 기후변화 피해 현장을 찾아가 독자들에게 기후위기의 심각성을 환기한 기획이다. 이정아 헤럴드경제 디지털콘텐츠국 기자는 “기후변화는 먼 얘기가 아니라 이미 우리가 사는 동네에서도 벌어지고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며 “올해 <라스트 포레스트> 시즌2를 계획하고 있는데 위기감, 문제 제기에서 나아가 독자들의 피부에 와닿는 대안, 실천을 다루고자 한다”고 말했다.
한겨레 기후변화팀은 지난해 5월 <코로나가 깨운 ‘그린뉴딜’ 뭘 담아야 하나> 기획을 통해 정부의 그린뉴딜 사업이 온실가스 감축에 실효성이 있는지 정책 검증에 집중했다. 동시에 기후위기 대응을 위해 에너지와 산업의 구조 전환이 불가피하다는 점에서 좌초 위기에 처한 산업 노동자 문제도 짚어냈다. 최우리 한겨레 기후변화팀 기자는 “그린뉴딜 정책이 단순히 환경, 과학 문제가 아닌 삶과 교육, 석탄발전소 노동자 문제까지 파생된다는 의제를 던졌다는 평가를 받았다”며 “기후변화를 인식하는 시민들의 감수성이 1년 새 확 올라가 이제는 좀 더 기후변화를 세밀하게 보려고 한다. 정부 정책이 ‘쇼잉’으로 끝나지 않도록 감시하는 역할과 함께 에너지 전환 문제, 산업·경제계 움직임까지 관련 부서와의 협업을 통해 보도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기후 보도, 질적 성장 고민할 단계…
“‘위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기후변화 문제를 다루는 언론보도가 다양화하고 관련 보도량도 크게 늘어났지만 양질의 보도까지 이어지지 않는다는 지적도 나온다. 기후변화청년모임 BigWave(빅웨이브) 저널리즘 모임에서 이뤄진 지난해 4~11월 언론사 기후변화 보도 모니터링 결과, 정부의 그린뉴딜 정책 발표 시기인 지난해 5~6월, 장마철인 지난해 7~8월 보도량은 급증했지만, 대부분 정부 보도자료 발 기사인 것으로 나타났다. 오동재 빅웨이브 운영위원은 “기후변화에 대한 명확한 의제 설정 역시 중요하다”며 “텍사스 한파 등으로 기후변화가 심각하다고 보도하면서도, 에너지 이슈에선 온실가스의 주범인 석탄발전, 제철 산업 건설 수출을 지향하는 식의 보도가 이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기후위기는 자연재해뿐만 아니라 정치, 사회, 경제, 국제, 노동 등 다양한 영역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기자들이 기후변화 사안을 공부할 기회가 필요하다는 제언도 있다. 신혜정 기자는 “환경 이슈는 공부가 많이 된 상태에서 취재해야 하는 분야다. <제로 웨이스트> 기획의 방향성을 정하고 처음 보도하기까지 한 달이 걸렸다. 그게 가능했던 건 기후대응팀이 출입처를 따로 배정받지 않고 기획에만 시간을 쏟을 수 있었기 때문”이라며 “그만큼 기후변화에 전문성을 가지기 위해 시간과 에너지 쏟을 수 있는 기자들이 있을지 모르겠다. 마감에 쫓기고, 언제까지 환경 관련 출입처에 있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환경부, 기업의 보도자료만으로는 의미있는 팩트를 찾기 힘들 것”이라고 말했다.
기후변화 이슈를 부서 전반으로 넓히는 편집국 차원의 내부 고민도 필요하다는 의견도 나왔다. 최우리 기자는 “지난해 1월 한겨레 산업부의 <미래차의 두 얼굴>이 좋은 예시가 될 수 있다. 정부와 기업이 미래차 산업에 대한 장밋빛 전망을 내놨지만, 미래차의 등장과 함께 사회가 겪게 될 성장통을 다룬 기획”이라며 “넒은 범위의 의제 설정에서 나아가 세세하게 각 부서에서 기후변화를 어디까지 다룰 수 있을지 편집국 차원의 고민이 필요하다는 게 내부에서 생겼다”고 말했다.
박지은 기자 jeeniep@journalist.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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