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최대 명절인 춘제(春節·음력 설) 연휴 기간에 베이징 중심가 톈안먼 광장 인근의 중국미술관을 찾았다. 소의 해인 신축년을 맞아 소와 관련된 회화·조각 등 각종 예술 작품을 전시한다는 말에 호기심이 일었다. 박물관 안은 예상과 달리 인파로 붐볐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을 막기 위해 귀성을 최대한 자제시킨 영향일 것이다.
박물관 1층 정중앙의 제1관을 비롯해 16개 전시관에서 특별전이 열리고 있었는데, 정작 관람객이 몰린 건 특별전과 관계 없는 한 전시관이었다. 내부로 들어서니 코로나19 사태 이후 중국 의료진의 헌신과 노고를 묘사한 전시물로 빼곡했다. 전시관 한가운데 눈물을 흘리는 모습의 중난산(鍾南山) 중국공정원 원사 초상화 앞에서 한 소년이 따라 울고 있었다. 중난산 원사는 중국 코로나19 방역의 아이콘으로 한국 언론에도 워낙 많이 언급돼 이름쯤은 들어 봤을 법한 인물이다.
소년에게 왜 우는 지 묻자 중난산 원사와 같은 영웅들이 있어 중국이 세계에서 가장 먼저 코로나19와의 전쟁에서 승리했다는 생각에 감정이 북받쳤다고 한다. 옆에 서 있던 할아버지는 손자가 대견스러운 듯 머리를 쓰다듬었고, 전시관 내의 몇몇 중국인은 박수를 치기도 했다. 이는 중국에서 전혀 낯선 광경이 아니다. 사실 관계는 차치하고, 중국인들은 코로나19 사태에서 벗어났다고 인식하고 있으며 실제 일상 생활의 모습도 그러하다.
현재 중국인들의 자부심과 자신감은 1840년 아편전쟁 이후 최고조에 달한 상태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경제·군사적으로 세계 2위를 굳힌 중국은 1위 미국을 맹추격 중이다. 여기에 코로나19 여파로 미국 경제가 크게 후퇴하면서 일각에서는 오는 2028년 중국의 국내총생산(GDP) 규모가 미국을 추월할 것이라는 전망까지 나온다. 아편전쟁 직전인 1820년 청나라는 전 세계 GDP의 33%를 차지하는 최강국이었다. 지난해 기준 중국의 비중은 17% 안팎. 200년 전의 위상을 되찾는 게 목표이고 또 반드시 이룰 수 있다고 믿는다.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이 입버릇처럼 외치는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 이른바 ‘중국몽(中國夢)’에 중국인들이 환호하는 이유다.
홍콩·티베트·신장위구르자치구의 인권 문제에 대한 미국 등 서방 세계의 비판은 흔한 딴지 걸기 정도로 여긴다. 중국의 약진에 배가 아파 그런다는 것이다. 중국이 다시 강국이 됐으니 주변국에 어느 정도의 압박을 가하는 것도 당연한 일로 치부한다. 기존 중화 질서의 회복이라는 주장을 서슴지 않는다. 작금의 성과는 중국 공산당의 영도 덕분이라고 찬양한다. ‘공산당이 없으면 신중국도 없다(沒有共産黨, 沒有新中國)’는 세상에 나온 지 80년 가까이 된 노래가 그 어느 때보다 우렁차게 울려 퍼지고 있다. 이 같은 중국 최고 지도부의 관념은 관영 매체를 통해 확대 재생산돼 중국인들에게 주입된다. 권위주의적이고 폐쇄적인 중국 사회라 가능한 일이다. 이미 국뽕에 취한 중국인들은 외부의 비난과 지적에 귀를 닫는다.
기인(基因). 근본적인 원인이다. 중국어로는 유전자라는 뜻도 있다. 부모가 자식에게 물려준 유전 형질이 발현되는 원인이라는 의미다. 시 주석이 집권한 뒤 자주 등장하는 표현이 있다. 홍색 유전자(紅色基因)를 대대손손 전승하자는 것이다. 이전에도 사용됐는지는 알 수 없으나 정권 차원에서 홍색 유전자를 강조한 건 시진핑 체제가 유일하다. 선열의 혁명 정신을 이어받자는 취지였겠으나 이제는 중국 우월주의, 중국 우선주의의 다른 말처럼 받아들여진다. 홍색 유전자가 더욱 강렬하게 발현될수록 공산당의 집권 기반은 공고해지고 주변국의 불안감은 커진다.
매년 춘제가 되면 온 중국이 붉은색으로 물든다. 선물용 내복과 속옷까지 붉은색일 정도다. 수천 년 전부터 중국인들은 붉은색을 사악한 것을 내쫓고 행운을 불러오는 색으로 여겨 선호해 왔다. 붉은색에 대한 중국인들의 유별난 애착을 ‘중국홍(中國紅)’이라 부른다. 마치 유전 정보가 전달되듯 중국인이 대를 이어 사랑해 온 붉은색은 본래 배려와 열정, 정의의 상징이라는 걸 잊지 말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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