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콘텐츠가 오래 살아남는다

[언론 다시보기] 김하영 ROBUTER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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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하영 ROBUTER 편집장.

▲김하영 ROBUTER 편집장.

“견오백, 지천년”(絹五百 紙千年)이라는 말이 있다. “비단은 500년을 가는데, 종이는 1000년을 간다”는 말이다. 1000년? 진짜 1000년을 간다. 가장 오래된 목판 인쇄물인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8세기에 만들어졌으니 지금 시점으로 1200년이 넘었다. 그런데 모든 종이가 이렇게 오래 가는 것은 아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쓴 노트가 500년 밖에 안 됐는데 삭기 시작하자 이탈리아 문화재 당국은 우리나라에 종이를 구하러 오기도 했다.


그 종이는 정확히 말해 ‘한지’(韓紙)다. 한지는 우리가 요즘 쓰는 일반적인 종이와는 성질이 다르다. 양지는 목재를 잘게 갈아 펄프로 만들고 화학약품을 섞어 풀어낸 뒤 롤러로 얇게 눌러 만든다. 반면 한지는 ‘닥나무’라는 특정 나무의 껍질을 이용한다. 겨울에 1년생 닥나무를 베 증기에 찐 뒤 껍질을 벗기고 티를 골라내 잿물에 삶고 깨끗하게 씻어 방망이로 두들겨 연하게 만든다. 이것을 황촉규라는 식물의 뿌리즙과 함께 물에 풀어 발로 떠낸 뒤 말리고 표면을 다듬어 완성한다. 우리가 입는 옷이 씨줄과 날줄로 얽혀 있듯이, 한지도 닥나무 섬유가 우물 정(井)자로 얽혀 있어 질기다.


얼마나 질기냐면, 조선시대 사관들은 실록을 기록할 때 일단 속기를 하고 나중에 옮겨 적었는데, 속기로 적은 종이는 물에 빨아 다시 썼다. 심지어 군인들은 ‘지갑(紙鉀)’이라고 하여, 한지를 여러 장 붙여 화살과 창을 막는 갑옷으로 만들어 입었다. 그 뿐인가. 흙으로 집을 짓던 우리나라에서는 한지로 벽에 도배를 하고, 콩기름을 먹여 장판으로 깔고, 문에 발라 창호로 썼다. 이렇게 한지의 쓰임이 많다 보니 동네마다 한지 공방이 있었고, 겨울만 되면 마을 사람들이 닥나무를 베 한지를 떴다.


한지는 이렇게 뛰어난 종이이지만 만드는 과정이 까다롭고 재료도 한정적이어서 값싸게 대량생산되는 양지에 밀리고 말았다. 가옥의 형태가 바뀌면서 장판, 벽지, 창호도 새로운 재료에 자리를 내줘야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디지털 시대에 한지의 가치가 다시 주목 받고 있다. 디지털 기록은 전기가 없으면 볼 수 없고 통째로 사라질 수도 있다. 해킹 등의 공격에도 취약하다. 이에 철저하게 보안을 지켜야 하거나 대대손손 오래 보전해야 하는 기록문서의 경우 종이에 기록해 별도로 보관하는 곳도 있다.


과연 ‘종이’가 문제일까. 1000년을 넘어 전해져 오는 기록들은 불경, 성경과 같은 경전이거나 역사서이거나 위대한 문학 작품이거나 중요한 철학적, 과학적 업적을 담은 문서들이다. 오래 살아남는 콘텐츠의 비결은 ‘한지냐, 양지냐’, ‘종이냐, 디지털이냐’가 아니라 얼마나 좋은 콘텐츠이냐는 것이다.


인류 문명을 바꾼 3대 발명품으로 문자, 종이, 인쇄술을 꼽는다.(그런 측면에서 우리는 역사적으로 훌륭한 유산을 가진 후손들이다) 오늘날 형태는 바뀌었어도 현대 사회에서 가장 치열하게 ‘문자’와 ‘종이’, ‘인쇄술’을 다루는 이들은 언론인이다. 결국 답은 어디에 무엇으로 써서 어떻게 전파하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좋은 콘텐츠를 만드느냐이다.


요즘 나는 컴퓨터 앞에 앉으면 스스로 묻곤 한다. “나는 지금 10년 뒤, 1년 뒤…. 아니, 당장 내일 다시 봐도 부끄럽지 않을 글을 쓰고 있는가.” ‘기자’라는 명함을 들고 다녔던 지난 18년이 주마등처럼 스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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