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슬 퍼런 정권에 맞서 언론자유 외쳤다"

언론탄압 진상규명 특별법-해방 이후 탄압 사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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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아일보 기자들이 10·24 선언 이후 자유언론수호를 위한 실천에 들어가자 정부는 광고탄압을 자행했다. 1975년 1월 15일 육군중위의 격려 광고를 트집잡아 광고국장 등 3명을 연행하자 동아일보 기자들이 항의 집회를 갖고 언론자유만세를 부르고 있다.  
 
  ▲ 동아일보 기자들이 10·24 선언 이후 자유언론수호를 위한 실천에 들어가자 정부는 광고탄압을 자행했다. 1975년 1월 15일 육군중위의 격려 광고를 트집잡아 광고국장 등 3명을 연행하자 동아일보 기자들이 항의 집회를 갖고 언론자유만세를 부르고 있다.  
 
해방 이후 우리 역사에서 민주주의에 역행한 역대 정권들은 각종 방식으로 즉 법과 제도의 틀을 만들어서 비 합법적 물리력을 이용해 인권을 탄압했고 언론은 이 시기 인권탄압을 조장하거나 최소한 알고도 방조하며 ‘권언유착’의 한 틀을 형성하고 말았다.

이 시기 이같은 권언유착에 동의할 수 없었던 언론인들의 많은 희생이 강요되기도 했다.

1951년 ‘동아일보 필화사건’을 시작으로 70년대 ‘동아투위’, 정권의 검열에 반대한 제작거부 투쟁, 87년 민주항쟁 등을 통해 우리 언론은 지금의 자유를 누리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우리 언론 과거사 중에는 아직도 명쾌한 진상규명이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

이에 본보는 오는 20일 ‘제 1회 기자의 날’을 맞아 해방이후 독재정권과 군사정권의 언론탄압에 맞서 싸워 ‘국민의 알권리’를 위해 온갖 탄압에 시달리다 해직된 언론인 선배들의 이야기를 한번 되새겨봄으로써 그들의 뜻을 기려보고자 해방이후 언론탄압의 대표적인 사례 몇 개를 순서대로 모아봤다.

해방이후 언론탄압의 대표적인 사례는 지난달 24일 국회정치커뮤니케이션연구회(회장 김재홍 열린우리당 국회의원) 주최로 열린 ‘해방이후 언론탄압에 대한 진상규명과 피해자 명예회복 및 배상에 관한 특별법 제정을 위한 토론회’에서 성공회대 김서중(신문방송학과) 교수가 발표한 ‘역대정권의 언론탄압의 배경과 사례, 그리고 교훈’이라는 주제의 내용을 참고했다.




이승만 정권

△1951년 동아일보 필화 사건

국민방위군 사건에 사형이 확정된 부사령관 윤익헌의 구명운동을 위해 김대운(방위군 정훈 공작원)이라는 사람이 윤익헌의 처로부터 거금을 받아 주한 미국대사를 비롯한 미국 고위층에게 뇌물을 주었다는 경찰 조서가 국회에 보고된 것에 대해 미국 무초대사가 우리정부에 항의했다는 기사가 문제 된 것이었다.

공보처는 정정기사 게재를 요구하고, 검찰은 이를 빌미로 편집인과 취재 기자 2인을 불구속으로 기소했다.





△조선일보 필화 사건

조선일보 부산 분실에서 4명의 장관이 사임했다는 잘못된 정보에 근거하여 속보판에 기사를 게재했다. 곧 잘못을 알아 신문에는 게재하지 않았으나 검찰은 출처를 밝히라고 요구하고 이를 거부하자 조선일보 주필이며 부산분실 책임자였던 홍종인을 구속했다.





△동아일보 오식 사건

‘고위층 재가 대기중 한미 석유 협정 초안’이라는 제목의 기사와 ‘괴뢰휴전 위반을 미 중대시’라는 제목의 기사를 위해 채자해 두었던 활자를 식자하는 과정에서 ‘괴뢰 고위층’이라는 오식이 발생했다. 인쇄 과정에서 동아일보가 먼저 발견하고 배포를 막았으나 몇 백부가 나간 상태였다.

동아일보는 이것들을 회수하는 한편 이 사실을 종로서, 내무부, 공보실 등에 자진하여 통보하였으나 정부는 관련자들을 구속하고 동아일보에 무기 정간을 처분했다.





△경향신문 정·폐간 사건

이승만 정권 아래 자행된 언론 탄압 중 대표적인 사건은 경향신문 정·폐간 사건이었다. 경향신문 정·폐간 사건이 의미를 지니는 것은 이승만 정권이 집권 말기에 정권을 연장하기 위해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기 때문이다.



첫째, 경향신문은 이승만의 강력한 정적인 장면 부통령을 지지하는 천주교 계 신문이었으며, 둘째, 폐간을 위해 적용한 법률이 미군정 법령 88호이었으며, 셋째, 서울 고법에서 행정처분 가처분 결정을 받아 얻은 복간의 기회를 자유당 정권은 같은 날짜로 무기 정간 처분을 하여 경향신문의 활동을 무조건 억제하려 했다는 점 등이다.



정부는 경향신문에 대해 1959년 1월 11일 자 ‘정부와 여당 지리멸렬상’이라는 사설, 2월 4일 여적 란에 실린 ‘다수의 횡포’라는 칼럼, 사회면에 실렸던 ‘사단장이 기름 팔아먹고’라는 기사, 이승만 대통령의 기자회견 기사 중 오보, ‘간첩 하모(某) 체포’기사로 인한 간첩 수사 방해(정부의 주장) 등을 이유로 1959년 4월 30일 경향신문을 폐간시켰다.



문제는 이때 사용한 법률이 미군정이 종식되었음에도 그 때 제정한 88호(허가제를 규정)를 폐지하지 않고 있다가 이를 사용한 것이었다. 이는 대한민국의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언론출판의 자유에 따르면 당연히 자동 무효화한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실정법 상 살아 있다는 이유로 적용한 것이었으며, 이에 경향신문이 행정처분 가처분 소송을 제기하여 서울 고법에서 6월 26일 가처분 결정을 받았다.



하지만 정부는 무기정간 처분으로 다시 대응했다. 그리고 경향신문은 4·19 의거 이후에야 복간할 수 있었다. 그동안 신문은 물론 언론인은 사실상 정부로부터 해직당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당시에 경향신문만이 아니라 폐간 내지는 정간 처분 당한 일간 신문과 통신은 10여 개에 달했는데 이들은 모두 광무신문지법과 미군정법령 88호에 의거해 이루어진 것들로 사실 상 위헌적 행위에 해당했다고 할 수 있다.





3공화국

△민족일보 사건

진보적 언론을 표방했던 민족일보는 5·16 직후인 5월 19일 폐간되었으며, 관련자 13명이 구속됐다. 그 중 발행인 조용수와 더불어 송지영, 안신규에게 사형을, 이종률, 이상두에게는 징역 10년, 양수정, 이건호에게는 징역 5년을 선고했다.



민족일보의 주장은 정권이 발표한 것처럼 북한과 일치하지는 않았으며, 오히려 당시 집권세력의 견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럼에도 민족일보를 용공으로 몰아 발행인 조용수를 사형시켰다. 이는 민족일보가 당시로서는 혁신세력들이 모인 곳이었고, 쿠데타 정권은 혁신세력을 제거하고 반공 이데올로기를 강화하고자 했던 의도가 엿보인다.



당시 혁명재판부가 용공의 의미로 예시한 기사들의 제목을 보면 ‘민족적 자생적 노력으로써 남북협상의 단계에까지 정세를 발전시키라(1961년 5월 16일)’, ‘범민족적인 통일 민족의 추진이 필요하다(5월 16일)’, ‘우선 체육교류부터라도 시작하자(5월 12일)’, ‘모처럼 찾은 통일외교의 이니시아팁을 뺏기지 말자(5월 9일)’, ‘남북학생회담 갖게 하라(5월 5일)’, ‘이북 쌀, 이남 전기, 젊은 사자들의 침묵된 데모(4월 10일)’ 등 통일과 관련된 주장들을 언급했다. 그러나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이 내용은 평화통일과 남북교류를 주장하는 것으로서 용공의 성격을 전혀 지니지 않은 것이었다.





△이영희 기자 사건

이영희 기자 사건은 조선일보 외신부에 근무하던 이영희 기자가 쓴 1964년 11월 21일 ‘유엔의 한국문제 토의에 있어서의 중립국의 동향’이라는 기사를 빌미로 이영희 기자와 선우휘 편집국장을 반공법 위반혐의로 구속한 것이다.



이 기사의 내용은 당시 유엔 총회에서 중립적 성격을 띠고 있는 인도네시아, 아랍공화국, 알제리, 캄보디아, 말리 등이 남북한 동시 가입 안을 정식의제로 제출하려 하고 있고, 이것이 제출되면 남한 단독 가입 문제가 의제로 오르지 못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이는 당시 외신을 참고한 것으로 사실 기사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당시 정부가 할슈타인 원칙을 고수하고 있었고, 유엔동시가입 논의를 터부시하던 상황에서 이영희 기자의 기사는 문제가 됐다. 원천적으로 정부의 통일 논의를 벗어 난 일체의 논의를 금지하고, 용어 자체도 통용되는 것을 막았던 사상 탄압의 사례다.





△송아지 사건

1965년 대전방송국에서 방송된 방송극 ‘송아지’는 그 작가인 편집부장 김정욱을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케 했다.



방송극의 내용은 농촌에서 금 같은 송아지의 값이 6∼7만원 하는데 이 돈이 도시에서는 하루 술값으로 나가고 있다는 점을 도시 처녀와 농촌 소녀의 인식을 비교하는 방법을 통해 세태 풍자한 것이었다.



그러나 검찰은 이를 무산계급과 유산계급의 대립관계로 보고 자본주의 사회구조의 모순을 제시하고자 한 것으로 기소했다. 반면 재판부는 특정계급을 염두에 두고 집필한 것으로 볼 수 없으며 북한을 찬양하기 위해 집필했다고 볼 수 없으며, 도시처녀의 전후파적인 기질을 규탄한 것에 불과하다고 판단하고 무죄 판결을 내렸다.





△‘오적’ 사건

‘오적’ 사건은 유신을 앞둔 3공화국 정부의 강력한 통제 정책이 그대로 반영된 사건이었다.



김지하는 ‘오적’이라는 시를 ‘사상계’ 1970년 5월호에 실었다. 이를 신민당 기관지인 ‘민주전선’이 전재함으로써 문제가 불거졌다. 이로 인해 ‘민주전선’ 주간 김용성, 편집위원 손주항, ‘사상계’ 발행인 부완혁, 기자 김승균 등이 반공법 위반혐의로 구속됐다.



당시 재판에서 유명 문인들은 시의 풍자성을 칭찬하고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고 의견을 밝혔으나 재판부는 1972년 12월 20일 오적이 특권층을 응징하는데 목적이 있었다고 하나 “그 빙자의 도가 지나쳐 우리나라 실정에서는 담시의 범위를 벗어난 것으로 보이며 이로 인해 계급의식을 조성, 북한의 선전 자료에 이용되었으므로 유죄를 인정”한다고 판결했다.



당시 서울 형사지법의 판결은 우리 현실에 대한 비판도 북한에 이로우면 처벌할 수 있다는 원칙을 적용한 것으로서 결과범을 처리하겠다는 것이었다. 이는 결국 사상의 자유를 최대한 억제하는 판결이었다.





△‘다리’지 사건

이 사건은 ‘다리’지에 1970년 11월호에 게재된 임중빈의 논문 ‘사회참여를 통한 학생운동’이 “국외공산계열인 전시 꽁방디 등 극좌파를 비롯한 미국의 뉴레프트주의자들의 활동을 찬양·고무·동조함으로써 동 국외공산계열 및 반국가단체인 북괴를 이롭게” 했다고 기소된 사건이었다.



앞의 두 사건과 달리 재판부는 논문이 공산계열이라고 불릴 수 없는 ‘꽁방디’나 ‘뉴레프트’를 다루고 있으며, 이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있고, 자유민주주의 체제 아래서 이질적인 것을 연구하고 발표할 자유가 있다는 주장을 받아 들여 무죄를 선고했다.





 

유신정권

△동아·조선 기자 해직

당시 언론 탄압의 대표적인 사례는 동아·조선의 기자 해직 사건이었다. 1975년 동아일보에서는 1백63명이 해직되고, 이중 1백34명이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를 구성하여 지금까지 언론민주화 운동을 해오고 있다. 하지만 이 당시 동아일보(방송 포함) 구성원만 해직 당한 것은 아니었다. 조선일보에서도 33명의 기자가 해직당하고 1명이 재입사해서 결국 32명이 ‘조선 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를 만들어 언론민주화 운동을 해왔다.



동아일보나 조선일보에서 언론민주화 투쟁이 이루어지게 된 배경에는 유신정권의 폭압적인 통제로 언론의 역할을 제대로 못하는 신문들에 대한 일반인 특히 대학생들의 분노가 존재한다.



“언제부터 언론은 그렇게 백성의 권익에 등져서 지배계급에 아부하는 아첨배가 되고 말았던가? 아첨으로 배를 불리며 백성의 내일을 장사지내려는 상여꾼들이여, 가라! 한가하고 유복한 장사치, 지배계급의 충실한 호위병들이여, 가라! 저 골고다의 계곡으로 사라져가라. 무기력한 필봉은 무기력한 백성을, 마취당한 필봉은 마취당한 백성을 만들 뿐이 아니냐? 우리는 언론마저 좌절당하고 무력화해버리고 또는 아첨해버리는 그런 오늘의 한국 현실을 통곡한다.”(고대생들이 채택한 공개장)



“한국의 언론이여! 그 무기력과 나태를 박차고 일어나 이 민족, 이 나라를 살리는 ‘시일야방성대곡’으로 민주 헌정수호투쟁에 과감히 참여하라! 우리는 외로운 투혼을 외롭게 하지 말아 달라는 것을 벅차오르는 기대와 뜨거운 열망으로 한국 언론계에 호소하고 싶다.”(연대생들이 채택한 메시지)



1971년 3월 26일에는 서울대학교 문리대, 법대, 상대의 학생회장단 10여명이 ‘언론인에게 보내는 공개장’, ‘언론화형선언문’, ‘언론인에게 고한다’는 유인물을 행인들에게 나누어주면서 이를 낭독하다가 경찰에 의해 해산됐다. 여기에서 이들은 “언론은 공정해야 하며 어느 특정인을 위해 편파적이어서는 안된다. 그런데 오늘날 신문은 언론인이 내는 신문인가, 상인이 내는 신문인가?”라고 물었다. 또 “듣건대 일선기자들의 고생스런 취재는 부차장선에서 잘리기 일쑤요, 힘들게 부차장선을 벗어나면 국장 선에서 난도질당한다니 이 무슨 해괴한 굿거리인가. 언론은 권력으로부터 독립하라. 특히 자주적인 편집을 방해하는 기관원을 신문사에서 축출하라”고 주장했다. 이 당시 이미 대학생을 비롯한 일반인들은 언론사에 대한 정권의 통제 방식이 어떻게 이뤄지는지 알고 있었다. 특히 기관원 출입을 알고 있었다고 봐야 한다.



이들이 언론화형식을 거행하면서 언론에 대한 극도의 불신을 표하자, 이에 이미 기사가 검열되고 있음에 자괴감을 느끼고 있던 동아일보 기자들이 1972년에 이어 1974년 10월 24일 ‘자유언론실천선언’을 발표함으로써 시작됐다. 이들의 움직임은 서울 소재 신문방송들은 물론 각 지역 신문, 방송들에게까지 번져갔다. 이에 대해 정부는 광고 탄압이라는 형태로 대응했다. 이미 기업화한 언론으로서, 광고에 대한 의존률이 높아진 신문으로서는 매우 큰 타격이 아닐 수 없었다고 하겠다. 선언이 있은 지 두 달이 채 못 된 1974년 12월 24일 광고주 20여 개 사가 한꺼번에 광고의 해약을 통고해 온 것이었다.



물론 이 광고 탄압은 유신정권의 의지에 따른 것이었다. 이는 박정희로부터 “동아일보를 혼내주라”는 지시를 받은 중앙정보부에 의해 계획됐다. 당시 동아일보 광고국장 김인호는 주거래 광고 기업체 간부들과 했던 면담에서 광고탄압이 중앙정보부에 의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증언했다. 즉 중앙정보부는 동아일보에 광고를 내오던 대기업, 극장 등 대 광고주의 사장과 광고담당 간부들을 불러 놓고 ‘왜 동아일보에만 광고를 내느냐’, ‘앞으로 동아일보에 계속 광고를 내면 곤란하다’ 등의 협박을 했다고 한다.



이 광고 탄압은 1975년 3월 17일 동아일보 기자, PD, 직원들이 강제 축출되고 난 후 일정한 정지 작업 기간을 거쳐 7월 16일을 기해 광고해약 사태가 풀리기 시작했다. 조선일보는 기사문제로 해고된 2명의 복직 문제가 풀리지 않자 농성투쟁을 전개한 것이며, 전술한 바와 같이 33명의 기자들이 해고, 축출된 이후에야 잠잠해졌다.



동아일보의 광고해약 사태를 본 독자들은 주머니 돈을 모아 격려 광고를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이는 이미 신문사의 규모가 확장되었기 때문이다. 1964년 언론윤리위원회법 파동 때 정부의 경제적 통제가 미미한 정도 밖에 영향을 못 준 반면 동아 광고 해약사태에서는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이는 조직의 규모가 커진 것과 더불어 조직 생존의 목표가 언론 사명 달성에 우선하는 경영진의 인식 변화와 무관하지 않았다. 독자들의 광고가 들어 올 때 매우 투쟁에 호의적이었던 경영진은 시간이 흐를수록 경영에 대한 불안감으로 투쟁을 종식시키고자 했던 것이었다.



당시 언론자유수호투쟁은 노조운동의 형식을 통해서 이루어진 측면이 있었는데 그러한 사례는 한국일보에도 있었다. 한국일보도 1974년 12월 10일 노동조합을 결성했다. 물론 전국출판노조에 가입한 것이었다. 이창숙 기자를 지부장으로 하는 임원 9명을 선출하고 운영세칙을 정하는 등 준비를 하여 서울시에 설립신고서를 접수시켰다. 물론 한국일보도 이에 대해 이창숙 기자를 해고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문제는 이창숙 기자에 대한 해임을 노조 설립 하루 전으로 소급해 해고했다는 점이다.





△언론통폐합

독재정권들이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항상 사용하던 통제 수단은 언론 통폐합을 통해 친정부언론 속에서 반정부언론을 솎아내는 것이며, 남아 있는 언론에 대해 경고를 하는 것이었다. 80년대 언론통폐합은 일반인들에게도 잘 알려진 것이었으나 1970년대 통폐합은 그리 알려진 것은 아니다. 정당성이 부족한 유신정권에 대한 사회 각계의 반발은 당연했고, 이를 옮기는 언론에 대해 유신정권이 불편해했을 것도 당연하다.



그 실태를 보면 우선 1972년에는 대구일보(3.30)와 대구경제일보(4.1)가 자진 폐간 형식으로 문을 닫았고, 이어서 지방지의 통폐합 논의가 시작되었다. 1973년 들어서는 한국경제일보(3.28) 동화통신(3.31), 대한일보(5.15) 등이 차례로 폐간했다. 이는 중앙지의 수를 줄이려는 정부의 의지가 관철된 것이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외견상 명분은 자진 폐간 형식을 띠었다.



더 문제는 지방지의 통폐합 과정이다. 정부는 1도 1사 원칙이라는 주장을 앞세워 언론사 통폐합을 유도해 나갔다. 대전에서는 대전일보가 중도일보를 합병하여 충남일보로 제호를 바꿨고(1973.5.25), 6월 1일에는 전북의 전북일보와 전북매일, 호남일보가 통합해 전북신문을 발족했다. 9월 1일에는 경기일보와 경기매일, 연합신문이 경기신문으로 통합했다. 이는 정부가 지역독점체제를 구축해주고, 비판을 무디게 하는 정권의 의도가 담겨있는 것이었다.



이 중에서도 경기일보와 경기매일, 연합신문이 경기신문으로 통합하는 과정은 당시 정부의 언론통제정책이 어떤 성격이었는지를 명백히 보여주는 사례다.



일반적으로 통합이 이뤄질 경우 1위 신문이 주도하는 통합을 예상하지만 사정은 그렇지 않았다. 기호신문이 1988년 회고한 바에 따르면, 수원에 기반을 두었던 연합신문의 홍대건 씨가 강력한 여권을 등에 업고 거대한 사옥과 시설을 갖춘 인천의 두 일간지를 흡수하여 연합신문이 주도하는 경기신문을 경기도의 단하나의 일간지로 만들었다. 이로써 인천에서 발행하는 지역신문은 없어졌다. 경기일보의 경영진과 기자들은 10년, 20년 몸담았던 직장을 잃고 헤매게 됐다고 한다.



이러한 사례는 이후 신군부에 의한 지방지 통합과정에서는 일반적인 경향으로 나타나는데 그 이유는 1위 신문이 아닌 사람에게 통합을 주도하게 함으로써 그 혜택에 대한 보답을 친 정부적 성향으로 보여줄 것을 기대하고 이루어진 정책이었다.



이들 신문들 중 자진 폐간의 경우에는 세인들을 호도할 명분이 있었다. 대구일보의 경우 프레스카드제의 발급을 계기로 기자들로부터 금품을 거두어들인 사건이 있었고, 대한일보의 경우는 사장이 수재의연금 착복했다는 혐의로 구속 상태에 있었다. 하지만 우리나라 3대 통신사의 하나인 동화통신의 폐간이나 피쳐 독점기사를 내보내던 AK 통신이 없어지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통폐합의 결과 1도 1사 주의가 완벽하게 이루어진 것은 아니지만 전국에 걸쳐 많은 지방지가 사라진 것은 틀림없다.



충남, 전북, 경기지방에는 1개씩의 일간지만 남았으며, 원래 1개씩의 일간지만이 존재하던 강원과 충북, 제주지방을 제외하면, 부산, 경북, 경남, 전남지방에서만은 2개씩의 일간지가 발행되어 1도 1사주의가 거의 이루어졌으며, 단지 14개만이 남았다.



이러한 변화가 언론정책의 결과였음을 암시하는 것으로 당시 윤주영 문공부장관의 발언은 의미가 있다. 장관은 국회 문공위원회 석상에서 “사원의 생계를 보장하지 못하는 언론사는 문을 닫아야 한다”면서 “경영부실의 지방지 통합은 환영할 만한 일이며 언론기관이 언론본래의 사명을 다하지 못할 때에는 통합 또는 증자를 통하여 이를 뒷받침하겠다”고 밝혔다.





△프레스카드제 도입

프레스 카드제의 도입은 명분상으로는 사이비언론을 줄이고, 기자 임금의 현실화라고 하는 긍정적인 측면을 내세웠다. 1970년대 들어서서는 사이비 기자에 대한 사회적 비난이 가중되고, 기자의 임금체계에 대한 기자협회의 조사결과가 발표되는 등 압력이 거세지면서 정부는 각 언론사에 임금현실화를 실행할 것을 종용했다. 이러한 기자임금 인상에 대한 압박과 동시에 1970년의 차관 도입에 의하여 기업의 규모가 커짐에 따라 한국 신문산업은 경영합리화의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한국 신문산업은 국가에서 실시한 프레스카드 발급을 기회로 1971년과 1972년 사이에 전체기자의 38%에 해당하는 1,920명을 해고했다. 결국 국가의 언론통제수단인 프레스카드 발급은 한국신문산업의 경영합리화를 위한 수단으로 이용됐다.



하지만 이와 같은 정책은 신문기자의 자격, 취재의 자격을 정부가 마음대로 좌우한다는 것으로 이것은 언론자유를 침해하는 가장 중대하고도 심각한 정책이었다. 그러나 전술한 바와 같이 기업화 과정을 통해 순치된 발행인들은 한마디 항의도 못하고 1971년 12월 17일 ‘언론자율에 관한 결정 사항’을 채택하여 자진해서 결의하는 형식으로 지지했다. 프레스카드제의 발급은 1973년 3월 7일 행정부 각처의 기자실을 줄이고, 출입 기자를 줄이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정부출입기자대책’이라는 것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엄청난 조치가 가능했던 것은 당시 노동 조건의 취약성에 기반했다. 당시 언론사들의 취업규칙을 조사한 바에 따르면 대부분의 한국신문사는 회사 형편에 따라 노동자를 해직시킬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었다고 한다.



정부의 간섭은 기자들의 자율적인 발행물이 기자협회보까지 이뤄졌다. 1973년 7월 4일에는 그 동안 주간으로 발행해온 기자협회보를 문공부가 월간으로 발행하도록 조치했다. 이 회보는 1964년 11월 10일 월간으로 창간했으나 1968년 8월 3일 이후 주간으로 발행했는데 이를 환원조치한 것이다. 기존의 일간지의 경우 사주, 발행인의 협조 아래 일정한 통제가 가능했으나, 기자들의 자율조직인 기자협회까지 압력을 넣기는 곤란했으므로 아예 발언할 매체 자체의 발행주기를 길게 만든 것이다.







5공화국

유신정권이 10·26사태로 무너지면서 각계의 민주화 요구가 거셌지만 이것은 신군부에 의해 무산되고 말았다. 특히 신군부의 집권과정은 5·16정권과 달리 많은 국민의 희생을 요구했고, 유신시절 만들어진 통일주체국민회의를 이용했다는 점에서 정당성을 상실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정당성 확보와 비판을 무마하기 위한 언론의 통제가 필요했을 것이었다.

체제 재생산의 한 방식으로 언론에 대한 통제가 필요한데 5공화국 시절 언론에 대한 통제는 그 필요성의 크기만큼 다양한 방식이 동원됐다.

첫째는 강제 언론인 해직과 언론통폐합이다.

둘째는 사실상 정부가 장악하고 있는 언론유관기구의 설립이다.



언론인 해직과 언론통폐합은 신군부가 추진한 것이나 신군부에만 주목해서는 안된다. 신군부가 정당성 확보를 위해 언론을 정비하려는 의도와 기업화한 언론이 경영에 장애가 되는 요인을 제거하려는 의도가 결합된 것이기 때문이다. 1980년 당시 언론인 해직기자의 수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은 어렵다. 문헌들도 이를 서로 다르게 밝히고 있다. 그 숫자는 어떤 기준으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음으로 오히려 더욱 중요한 것은 신군부가 요구한 숫자보다 더 많은 수가 해직을 당했다는 사실일 것이다. 언론경영진은 신군부에 대항해서 언론을 지키려는 노력보다는 그 기회를 이용하려는 의도가 더 컸다고 할 수 있다.



1980년의 언론인 강제해직과 언론통폐합은 언론구조의 전면적 개편이었다. 그리고 정부는 이 구도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하여 언론기본법을 제정하여 시행한다. 언론기본법은 언론의 공익성을 강조하고(3조), 시설기준 조항(21조)을 유지하며, 발행인의 결격 사유(16조)·등록취소 조항(24조)을 강화하는 등 언론을 통제하는 법적 근거로서 제정된다. 이종완 기자의 전체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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