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 남용 '피의사실공표죄'…피의자 권리·언론자유 '인권의 두 얼굴'
인권의 날 기념 '미디어와 인권' 국제심포지엄
김희영 기자
hykim@journalist.or.kr
2013.12.18 14:3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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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 인권의 날 65주년을 맞아 법무부가 12일 서울 서초동 대검찰청 베리타스홀에서 개최한 ‘미디어와 인권’ 국제 심포지엄의 첫 번째 세션 ‘피의사실 공표와 미디어’에서 사회를 맡은 박경서 한국인권대사가 발언하고 있다. (사진=법무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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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해야” “실효성 없어 폐지해야” 찬반양론
25년간 접수된 4백여건 중 기소 건수 ‘제로’
수사정보 유출은 피의자 변론권 심각히 침해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부터 국가정보원 대선개입 사건까지, 언론에는 ‘피의사실공표죄’ 논란이 끊임없이 제기됐다. 그만큼 해당 조항의 폐지냐, 강화냐를 두고 각계의 의견이 맞서고 있다.
세계 인권의 날 65주년을 맞아 법무부가 12일 서울 서초동 대검찰청 베리타스홀에서 개최한 ‘미디어와 인권’ 국제 심포지엄의 첫 번째 세션 ‘피의사실공표와 미디어’는 그래서 관심을 끌었다. 이 세션에서 심석태 SBS 국제부 부장(서강대 법학전문대학원 겸임교수)은 피의사실공표죄에 대해 “실효성도 없으면서 정치적 공방의 수단만 되는 조항을 계속 유지할 필요는 없다”고 주장했다.
해외의 경우 피의사실공표죄 논란은 각종 강력범죄나 신종 범죄 등 사회 안전과 관련한 보도에서 제기돼 왔다. 수사 과정에서 피의자의 실명 등 사생활 정보가 노출되는 것이 정당한 언론자유의 범위에 속하는 지가 주된 논점이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정치적 사건에 해당할 때, 특히 야권에 대한 수사가 진행될 때 피의사실공표죄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는 것이 특징이다.
지난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이 뇌물수수 피의자로 검찰 조사를 받았을 때 언론은 수사상황을 무분별하게 생중계식으로 보도한다는 비판을 받았고, 이후 법무부는 2010년 ‘인권보호를 위한 수사공보준칙’을 마련했다.
옷 로비 의혹사건 등으로 수사를 받았던 박주선 민주당 의원은 피의사실공표 행위의 근절을 촉구하며 검찰 개혁을 주장하기도 했고, 지난 2011년 곽노현 전 서울시교육감 수사 과정에서도 피의사실공표가 쟁점으로 떠올라 긴급토론회가 개최됐다. 한명숙 전 총리는 정치자금법 위반 의혹과 관련해 국가와 해당 의혹을 보도한 언론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으나 패소했다. 한국일보가 이석기 통합진보당 의원의 내란음모 RO 회합 녹취록을 입수해 보도한 일은 가장 최근에 불거진 사건이다.
심 부장은 “피의사실공표를 지적하는 시민, 언론단체도 모든 종류의 수사 보도와 관련해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아니다”라며 “여야가 동일한 사안에 피의사실공표의 문제를 지적하는 경우도 거의 없다. 피의사실공표는 순수하게 인권적 문제로 제기되지만 실상은 사안 자체나 처리과정 등에서의 정치적 힘겨루기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특히 국정원 대선개입 사건과 이석기 의원 사건을 비교 분석한 대목이 눈길을 끌었다. 심 부장은 “국정원 대선 개입 의혹 사건에 대해서는 상당한 수사 보안이 이뤄지는 반면 이석기 의원 사건의 경우 수사 과정에서 중요한 기록물이 통째로 언론을 통해 공개됐다”며 “실제로 야권 등에 대한 수사가 진행될 경우 피의사실공표죄를 둘러싼 논란이 강하게 제기됐다는 것은 결국 수사기관이 야권과 관련한 인물에 대한 수사 과정에서 피의사실에 해당하는 정보를 언론에 흘리는 경우가 더 많았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름을 밝히지 말아달라고 요구한 한 법학과 교수는 정치적 남용 가능성과 피의자의 명예훼손 측면에서 오히려 피의사실공표죄가 강화될 필요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이 교수는 “기소 이전에 피의사실을 공표하면 피의자는 일방적으로 당하는 입장이 될 수밖에 없고 대등한 변론권도 행사할 수 없다”며 “검찰 스스로가 적용 대상이기 때문에 기소된 전례가 없을 뿐이다. 이 정도 장치도 없으면 피의사실을 정치적으로 이용할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말했다.
실제로 피의사실공표죄가 형사처벌로 이어지는 경우는 없었다. 이명신 서울서부지방검찰청 부부장 검사에 따르면 지난 1989년부터 25년간 피의사실공표 사건은 총 432건 접수됐으나 기소는 0건(혐의 없음 51.5%, 각하 33.3%, 죄가 안 됨 10.7%, 공소권 없음 2.4%, 기소유예 2.1%)에 그쳤다.
이 교수는 피의사실공표죄의 강화로 언론의 부정·비리 감시가 축소될 수 있지 않느냐는 지적에 대해서는 “언론이 검찰과 경찰이 원하는 대로 휘둘리고 있는 것은 더 큰 문제”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한 중앙일간지 법조팀장은 피의사실공표죄의 필요성에는 공감하면서도 언론의 순기능에 더 집중해줄 것을 요구했다. 이 기자는 “피의자 입장에서 확인이 안 된 사실이 보도되면 피해를 받을 수 있다는 점은 인정한다”면서도 “피의사실공표 논란을 모두 기자들의 탓으로 돌리면 안 된다. 공공기관은 정보를 감추려는 특성이 있고, 기자들은 사회적으로 중요한 사건에 대해 어떻게든 이야기를 전해야 한다. 기자들은 믿을만한 취재원에게 정보를 얻고 있다”고 반박했다.
실질적으로 사문화된 피의사실공표죄가 숱한 정치적 논란을 촉발시키는만큼 이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다시 이뤄져야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심 부장은 “언론자유 지상주의는 아니지만 규제가 능사는 아니다”라며 “미디어는 가해자, 인권은 피해자라는 대립적 구도는 맞지 않다. 공적 정보의 공개범위, 그리고 사생활의 범위 등에 대한 우리 사회의 기준을 재검토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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