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C도 속고, 국민도 속았다

[특별기고] 이용마 MBC 기자·MBC노조 홍보국장

  • 페이스북
  • 트위치

   
 
  ▲ 이용마 MBC 기자  
 
MBC 파업이 140일을 막 넘은 지난 6월20일. 김재철 사장 퇴진과 구속수사를 촉구하는 대국민 서명전의 열기가 뜨거워지면서 조합원들의 사기가 한껏 고조될 때였다.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후보 측에서 갑자기 연락이 왔다. 자신이 노동조합을 적대시할 이유가 없고 노조 주장에 공감하는 점도 있다며, 먼저 파업을 풀고 복귀하면 순리대로 모든 일이 풀릴 것이라는 메시지였다.

이 메시지를 받고 두 가지 생각이 스쳤다. 먼저 100일 넘게 파업을 하는 동안 김재철 사장을 일방적으로 편들던 여당, 그 여당이 드디어 반응을 보인 것이다. 반가워해야 할 일이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노동조합이 여당의 수장과 물밑 거래를 하는 일이 과연 바람직한가 하는 원칙적인 고민이었다.

하지만 여당과의 교감 없이 MBC 사태는 해결되지 않는다. 형식적으로 MBC 사장의 임면권을 가진 사람은 방송문화진흥회 이사들이지만 이들은 여야 정당의 대리인이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 시절 방문진 이사들의 독립성이 강화되기도 했지만 이명박 정부 들어 상황은 반전됐다. 김우룡 전 이사장이 밝힌 것처럼 김재철 사장을 임명한 주체가 이명박 대통령이듯, 김 사장을 내보낼 당사자 역시 여당밖에 없다.

우리는 바로 이 이유 때문에 박근혜 후보와의 물밑 거래라는 독배를 마시기로 했다. 먼저 이상돈 새누리당 위원이 실제 박 후보의 메신저인지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또 지나치게 원론적인 메시지 대신 더 구체적인 담보가 필요했다. 그래서 이 위원에게 이런저런 내용이 포함된 박 후보의 언급과 박 후보의 약속을 담보할 원내대표 수준의 합의를 역제안했다.

박 후보는 불과 이틀 만에 우리가 원한 공개 언급을 했다. 이상돈 위원이 박 후보의 메신저임을 확인해준 것이다. 박 후보는 또 이 위원을 통해 원내대표 수준의 합의와 관련한 답변을 전달했다. “노조가 명분을 걸고 들어오면 나중 일은 제가 책임지고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면 당을 움직일 수 있습니다. 제가 당을 설득하겠습니다.”

‘원칙과 신뢰의 정치인’이라고 자부하는 박근혜 후보 본인이 직접 책임지겠다는데 더 이상 어떤 담보가 필요한가. 당장이라도 파업을 접고 올라가자는 섣부른 의견도 나왔다. 하지만 박 후보의 구두 약속 하나만 갖고 조합원들에게 파업중단을 설득할 수는 없었다. 더욱이 당시는 파업 열기가 절정에 달할 때였다. 국민들의 관심이 최고조에 이른데다 야당이 MBC 파업 해결을 19대 국회 등원조건으로 걸어놓은 상태였다.

결국 방송통신위원들도 김재철 퇴진의 불가피성을 인식하고 하금열 청와대 대통령실장을 설득해 여야 원내대표들과 물밑 합의를 했다. 그 결과 김재철 사장 퇴진을 조건으로 여야 원내대표 간에 19대 국회 등원합의가 이루어진 것이다. 불과 10여 일 만에 막혔던 모든 일이 순조롭게 풀린 것이다.

우리는 3중의 안전장치를 확보했다고 믿었다. 박근혜 후보와 여야 원내대표 그리고 방송통신위원들의 약속. 하금열 대통령실장의 약속은 보너스이다. 당사자들이 약속을 쉽게 저버리기엔 너무 무거운 존재들이었기에, 갑작스런 회군에 대한 일각의 비난도 감수하고 파업을 중단했다. 하지만 이 약속은 대선이라는 중차대한 승부처를 앞두고 한 순간에 휴지조각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새누리당의 의사결정구조를 아는 사람들은 이 약속파기의 주역이 박근혜 후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인혁당 문제에 대한 사과 때도 그랬고, 정수장학회에 대한 기자회견 때도 그랬다. 당 최고위원들 간의 논의를 거쳐 이뤄진 사항도 박 후보의 말 한마디면 쉽게 뒤집어지는 현실을 말이다. 김종인 새누리당 행복추진위원장과 약속한 경제민주화 역시 마찬가지 운명을 맞았다. 그래서 김재철 사장의 퇴진 약속 파기도 박근혜 후보의 묵인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또한 잘 알고 있다. 이것이 ‘원칙과 신뢰’를 지킨다는 박 후보를 믿고 따른 결과인가?

그래서 걱정이다. 박근혜 후보가 만약 대권을 잡게 된다면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까? 대선을 앞두고 당선되기 위해 수많은 ‘공약’을 쏟아내고 있지만 당선된 뒤 약속을 지키는 것은 전혀 별개란 사실을 우리의 경험을 통해 이미 확인했기 때문이다. MBC도 속고 국민도 속았다. 박근혜 후보는 김재철 사장 퇴진 약속을 당장 이행하라! 이용마 MBC 기자의 전체기사 보기

배너

많이 읽은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