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독재 정론지 '사상계' 이끈 언론인…자유당·군사정권과 맞대결
'의문사 진상규명' 촉구 계기로 다시보는 언론인 장준하의 삶
장우성 기자
jean@journalist.or.kr
2012.08.29 14:4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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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5년 2월 21일 서울 면목동 자택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민주회복을 위한 모든 국민의 노력을 단일화할 것을 촉구하고 있는 장준하 선생. 사진 오른쪽은 함석헌 선생. 장 선생은 이로부터 6개월 뒤 의문의 죽음을 당한다.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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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8월17일 경기도 포천 약사봉에서 절명한 장준하 선생의 의문사 진상규명 여론이 다시 불붙고 있다. 경기 파주시 ‘장준하기념공원’ 이장을 계기로 공개된 장 선생의 유골 머리 뒤쪽에서 둥그런 함몰 흔적이 발견됐기 때문이다. 장준하기념사업회와 유족은 정부에 전면 재조사를 촉구하고 정치권도 나서고 있다. 이를 계기로 본보는 자유당·군사정권에 맞서 반독재 정론으로 이름을 떨친 ‘사상계’를 이끈 언론인으로서 장 선생의 삶을 재정리해본다. 장준하 선생(1918~1975)은 일제에 항거했던 독립운동가, 독재정권에 맞선 야당 정치인이자 재야 민주화운동의 대부였다. 동시에 권력을 비판하고 감시하는 언론의 사명을 실천한 언론인이기도 했다.
장 선생의 언론인으로서 길은 광복군 시절부터 단초가 마련됐다. 1944년 태평양 전쟁 말기에 궁지에 몰린 일제의 징용 정책으로 학도병으로 입대한 그는 6개월 만에 탈출, 중국 안휘성(安徽省) 임천(臨泉) 군관학교에 도착했다.
임천군관학교 한국 광복군 훈련반에서 생활하던 그는 김준엽 등 동지들과 함께 ‘등불’이라는 잡지를 만들었다. 훈련반원들의 자치 강좌와 자작 글을 모은 문집 형태였다. 사람들은 단 2부뿐인 이 잡지를 읽을 차례를 안달하며 기다릴 정도로 반응은 대단했다. 장 선생은 저서 ‘돌베게’에서 ‘등불’이 자신의 언론 활동의 효시였다고 자평했다. 독재정권 시절 등불이 된 ‘사상계’의 맹아였던 셈이다.
“이것이 나와 잡지와의 최초의 인연이 되었다. 세상이 말하는 출판업자나 잡지발행인으로서 그 출발이 이때부터 시작된다.…‘등불’은 진정 우리들의 뜻대로 등불로서 불을 밝히고 앞장서 길을 밝히며, 꺼지지 않는 등으로 이 민족 누구에게나 손에 손에 들게 만들어주고 싶은, 그때의 뜻을 스스로 짓밟고 싶지 않다. 그것은 가마니를 깔고 누워 받은 최초의 사명감이었다.”
광복군 시절 ‘등불’ ‘제단’ 발간‘등불’은 2호로 수명을 다했지만 장 선생이 중경임시정부로 옮긴 뒤 복간됐다. 임시정부 주석이었던 김구는 등사기를 직접 구입해주는 등 흔쾌히 지원했다. 본격적인 인쇄물 형태를 갖추고 150부 이상을 찍어내 중경의 조선인들에게까지 배포됐다.
중경을 떠나 서안 광복군 제2지대에서 미국 전략정보기관(OSS) 대원에 지원, 국내 침투작전 수행을 위해 특수훈련을 받던 장 선생은 ‘제단’이라는 이름의 두 번째 잡지를 창간한다. ‘제단’은 이름에서도 나타나듯 조선인 젊은이들의 죽음을 각오한 결연한 독립투쟁 의지를 담은 잡지였다. 이 ‘등불’과 ‘제단’은 장 선생이 인편을 통해 고향의 아내 김희숙에게 유품처럼 전달했으나 한국전쟁 과정에서 사라져 현재까지 찾아볼 수 없다.
꿈에 그리던 국내 진공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1945년 8월 14일 서안비행장을 이륙한 비행기에 탑승했던 장 선생과 일행은 서해 상공 위에서 귀환 명령을 받았다. 이튿날 일왕은 항복 선언을 하고 한반도는 해방을 맞았다. 이후 임시정부 요원들과 함께 귀국한 장 선생은 김구 주석의 비서가 돼 연설문과 성명을 작성하고 정세를 분석해 보고하는 등 지근거리에서 보좌하는 역할을 맡았다. 임정 요원들의 불철저한 처신에 회의를 느꼈던 그는 김구의 곁을 떠나 광복군 참모장을 지낸 이범석이 주도하는 조선민족청년단(족청)에 가입했으나 이 인연 또한 오래가지 못했다.
부산에서 ‘사상계’ 창간사회활동 일선에서 거리를 둔 채 맞은 한국전쟁 통에 그는 피난정부가 들어선 부산으로 내려간다. 여기서 고향 선배인 백낙준 문교부 장관의 권유로 ‘국민사상연구원’에 몸담고 기관지인 ‘사상’을 만든다. 전란 중에 국민정신 함양을 위한 학술교양지 성격을 띤 ‘사상’은 4호까지 발행됐으나 이 잡지가 자신에게 비판적 지식인들이 주축이 된 것이라며 불편한 심기를 가진 이승만의 지시로 폐간되기에 이른다.
국민사상연구원을 떠난 장 선생은 자력으로 ‘사상’의 속간호를 내기 위해 불철주야 뛰어다녔다. 부인의 옷가지까지 내다팔아 마련한 자금으로 1953년 3월10일 ‘사상계’ 창간호(4월호)가 빛을 본다. 3000부를 발행한 창간호는 예상 밖으로 매진돼 추가 주문이 쇄도할 정도로 큰 반향을 얻는다. 교양지 성격이 강했던 ‘사상’에 비해 ‘사상계’는 국내 정치·사회를 비판적으로 조망하는 종합지로 발전했다.
이후 함석헌, 김준엽, 안병욱, 김성한 등 당대 지식인들이 합류한 ‘사상계’는 최고 10만부, 400페이지가 넘는 분량으로 외형적인 성장을 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자유당 정권을 위협하는 반독재 투쟁의 정론지로 발돋움했다.
사상계가 얼마나 독보적 비판 언론이었는지는 함석헌이 1958년 8월호에 실은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가 잘 나타내준다.
“6·25 전쟁은 미국을 배경으로 한 이승만과 소련·중공을 배경으로 한 김일성의 싸움이었지 민중이 한 싸움은 아니다. 그러니까 서울을 빼앗겼을 때 저 임진왜란 때 선조가 그랬듯 이승만도 국민은 다 버리고 민중 잡아먹고 토실토실 살이 찐 강아지 같은 벼슬아치들과 여우같은 비서 나부랭이들만 끌고 야밤에 한강을 건너 도망간 것이다.…이제라도 늦지 않으니 그런 허튼 수작들을 버리고 깨끗이 지난 잘못을 회개하여 진정으로 나라를 위해 일하라.”
같은 해 12월, 자유당이 격렬히 반대하는 야당 의원들을 무술경위를 동원해 격리시키고 날치기 통과시킨 ‘보안법 파동’ 때는 ‘백지 사설’로 파장을 일으켰다. 사상계는 발행인인 장 선생이 도맡아 집필했던 사설 격인 ‘권두언’이 유명했다. 이 보안법 파동을 맞아 사상계는 ‘무엇을 말하랴, 민권을 짓밟는 횡포를 보고’라는 제목만 달린 백지 권두언을 게재한 것이다.
4·19로 자유당 정권이 몰락한 뒤 장준하는 장면 정권의 권유로 ‘반민반관(半民半官)’ 단체인 국토건설본부 일을 함께 맡게 된다. 국토건설본부는 대학졸업자들을 정예 훈련시켜 농어촌발전의 일꾼으로 양성한다는 계획을 세웠으나 5·16 쿠데타로 물거품이 되고 만다.
5·16 군사정권과의 투쟁과 시련군사정권의 등장과 함께 사상계 역시 고난의 행군에 접어들게 된다.
장준하와 사상계는 서슬퍼런 군사정권 아래서도 비판의 칼을 거둬들이지 않았다. 당시 “군사혁명을 모독했다”며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종필 앞에 잡혀가 벌였던 설전은 유명한 일화로 알려져 있다. 군사정권은 장면 정권이 사상계의 부채 일부를 갚아준 것을 두고 그를 ‘부정부패 언론인’으로 낙인찍어 정치활동규제법의 대상으로 삼기도 했다.
이 같은 타격과 세무사찰 등 군사정권의 압박으로 사상계는 정기구독 외의 판매가 급감하고 지식인들이 기고를 주저하는 등 안팎의 난국에 부닥치게 됐다. 1963년 장 선생은 막사이사이상 언론문학부문을 수상하는 등 국제적인 주목을 받았으나 이를 되돌리지는 못했다. 장준하와 박정희 간의 투쟁은 더욱 가열되는 양상을 띠었다.
박정희와 숙명적 대결그는 1964년 5월 조선일보가 기획한 지상토론회에 기고한 글에서 ‘대통령 박정희씨’라고 지칭하며 거센 비판을 쏟아냈다. 1966년 당시 삼성계열사의 사카린 밀수 사건 때는 “박정희는 우리나라 밀수왕초다”라고 공개 연설을 했다는 이유로 국가원수 모독 혐의로 구속되기도 했다. 1967년 대통령선거를 앞둔 신민당 윤보선 후보의 지지유세에서는 “박정희는 청년을 월남에 팔아먹었고 과거 공산주의 조직책이었던 사람”이라고 정면 비판했다가 허위사실 유포죄로 다시 구속되기에 이른다. 옥중에서 제7대 국회의원 선거 동대문구에 출마를 선언한 그는 압도적인 표차로 당선되며 자의반 타의반 정치인의 길에 들어섰다. 원내에 진출한 그는 사상계의 발행인에서 물러나면서 언론인으로서 삶을 일단 정리하게 된다. 이후 재기를 모색하던 사상계는 1970년 5월호에 게재한 김지하의 ‘오적’을 구실삼은 군사정권에 폐간당했다.
8대 국회의원 선거에 낙선하고 재야운동의 대부로 자리잡은 장 선생은 동아투위 사태가 벌어진 1975년, 의문의 죽음을 앞두고 장남의 결혼식에 들어온 축의금 전액을 동아투위 기자들에게 전달하기도 했다. 그의 맏며느리인 신정자 역시 동아투위 사건으로 해직된 언론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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