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 정권 언론자유 후퇴 없었다? 다른 세상에 사는 모양"

[기협 인터뷰] 새누리당 이상돈 비상대책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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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TN·MBC 사태 원인이 무엇이든 대승적 해결 시점”


이상돈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중앙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은 최근 ‘뉴스메이커’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위기에 빠진 집권여당의 비대위원으로서 정치 개혁을 선도하고 있다. 정권 말을 맞아 미디어 이슈가 다시 불붙는 이 시점에서 평소 언론에 대한 식견이 깊던 그의 생각이 궁금했다. 이 인터뷰는 지난 13일 서울 흑석동 중앙대 그의 연구실에서 이뤄졌다.

-비대위 활동 이후 기자들 상대할 일이 많이 늘었을 텐데.
“개인적인 언론자유를 제약받고 있다.(웃음) 최근 몇몇 인터뷰에서 발언이 와전된 적이 있다. 쓴 기자들이 그런 답변을 원했던 것 같다. 필요 이상으로 파문이 일어나니 당혹스럽다. 과거에는 시원시원하게 말했는데 지금은 스스로 자기검열을 한다.(웃음)”

-총선에서 새누리당이 100석을 넘기기 힘들다는 분석도 있다.
“박근혜 비대위원장이 탄핵 정국 후인 2004년 당대표 시절 121석을 얻었다. 이번에도 120석이 되면 선전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정권 심판론이 워낙 거세고 대통령 주변 악재가 너무 많다. 박희태 국회의장 사퇴도 늦었다. 이상득 의원도 진작 탈당했어야 했다. 일찍 털어줬으면 부담이 훨씬 덜했다. 이러다보니 유권자들에게는 새로 태어난 당이라 해도 부정적 이미지가 강하다. ‘MB 프레임’에 갇혔다. 구체제와 선을 긋지 못하고 부담을 떠안고 가면 총선은 심판론의 회오리에 휩싸인다. 그러나 구 한나라당 체제의 실패를 잘 극복하고 좋은 인물을 많이 영입하면 120석 플러스 알파도 가능할 것이다.”

-왜 박근혜 위원장을 지지하는가.
“간단하다. 박 위원장은 2004년 이후 범 보수 진영을 대표할 수 있는 유일한 대통령 후보다. 2007년 대선에서 박 위원장이 대통령에 당선됐으면 오늘날 이런 일은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보수의 뿌리가 흔들리는 부정부패와 국정실패, 민주주의와 법치주의 훼손, 독선적 국가운영은 없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개혁을 지지하나 진보 야당의 주장에는 선뜻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많다. 국가의 역할이나 시장을 바라보는 견해, 해방 이후 우리 역사를 보는 관점이 다르다. 그래서 내가 MB정권을 비판해도 그들 역시 날 자기편이라고 생각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박 위원장은 여러 가지로 통한다. 그는 노무현과 이명박이라는 양극단의 실패를 극복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지도자다. 고 박정희 대통령을 이유로 비판하는 건 옳지 않다. 정치적 자산을 획득한 건 부친의 힘이 컸지만 정치인으로서는 자기 힘으로 성장했다. 부친의 과(過)만 들어 부정적 이미지를 덧씌우는 건 일종의 연좌제다. 이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도 있겠지만 박 위원장은 중간지대의 많은 국민을 설득할 수 있다.”

-로널드 레이건 미 전 대통령이 닉슨과 차별화를 통해 집권한 예를 자주 든다.
“미국 공화당도 닉슨 대통령 때까지는 민주당과 국내 정책에서는 차별이 없었다. 똑같이 세금 많이 걷어 정부지출 늘리는 뉴딜정책의 연장선이었다. 닉슨은 워터게이트로 공화당을 몰락 위기에 빠뜨렸다. 레이건은 비대한 정부 만능주의를 벗어나 ‘작은 정부’를 내걸었다. 그러면서도 국민과 소통하고 깨끗한 이미지로 불과 4년 만에 정권을 되찾았다. 시대정신을 간파한 것이다. 닉슨 식 공화당과 선을 긋고 새로 태어났다. 영국 노동당이 보수당에 연패하다가 재기한 원동력은 토니 블레어와 고든 브라운 총리의 ‘제3의 길’ 정책이다. 노조만 중시하는 노동당의 전통적 사고를 깼다.

박 위원장은 그렇게 할 수 있다. 지금 상황은 1970~80년대 영국과 미국과는 다르다. 오히려 지나친 경제 집중과 과도한 유동성, 빈부 격차 확대가 문제다. 박 위원장은 기존의 보수에 구애받지 않고 시대 요구에 따라 정책을 쇄신하고 있다. 시장경제를 부정하는 건 아니다. 민주당과도 구분되고 MB와도 구분되는 정책을 편다. 이런 걸 ‘좌클릭’이라고 비판하는데 그 당시 영국 노동당도 노조로부터 ‘우클릭’이라고 비난받았지만 변신에 성공해 10여년을 집권했다. 레이건과 블레어를 벤치마킹해야 한다.”



   
 
   
 
-4대강과 미디어법은 MB정부의 대표적 정책인데 가장 강력히 비판하고 있다.

“주요 언론 모두 4대강에 침묵했다. 언론의 정부 감시와 비판 기능은 기본이다. 이런 언론자유가 민주주의의 척도다. 언론의 4대강에 대한 침묵도 언론자유 후퇴에 책임이 있다. 미디어법은 시장 현실에 맞지 않는데 인위적으로 했다. 신문이 방송하지 말라는 법은 없으나 과연 시장의 요구에 따른 것인지는 회의적이다. PD수첩 예처럼 언론의 보도와 논평이 형사 소추 대상이 되는 것도 부당하다. 조선일보 비상임 논설위원 때 의정부 법조 비리 관련해 MBC 기자가 유죄판결을 받아 법정구속이 됐다. 내가 보도가 다소 사실이 아니라고 해서 기자를 구속하는 건 부당하다는 사설을 썼다. 언론인이 기사 때문에 감옥에 가야 한다면 언론자유와 국민의 알권리는 후퇴한다. 민사 소송 등 행정적 책임이나 사과는 할 수 있으나 형사 문제로 가는 건 옳지 않다.”

-박 위원장이 미디어법, MBC, YTN 사태, 4대강 등 현 정권의 아킬레스 건에 침묵해선 안된다고 말 한 적이 있다.
“내가 박 위원장을 많이 괴롭힌 것 같다.(웃음) 4대강 문제는 박 위원장 입장에서 어려운 위치에 있었다. 박 위원장이 가장 올바른 정치인이니 선을 그어주길 바랐다.”

-현재 YTN 해직 사태를 비롯해 MBC 총파업 등은 현 정권의 언론정책 실패가 야기한 것이 곪아 터진 것이라는 의견이 많다.
“‘언론정책’이란 말 자체가 이상한 것이다. 언론을 통제할 수 있다는 생각도 믿기지 않고, 언론자유가 진전되면 다시는 과거로 못 돌아갈 줄 알았다. 언론이 정부를 제대로 감시하고 비판했는지 언론계 스스로 반성할 면도 있다. 그런 맥락에서 MB정권은 사실상 실패했고 집권여당은 붕괴됐다. 이런 상황은 국민의 심판에 따른 것이다. 그래서 이제 언론 현안도 대승적으로 풀어야 한다고 본다. KBS, MBC, YTN 사태를 정부와 새누리당, 야권 3자 합의해서 대승적으로 해결해야 한다. 특히 YTN 기자 해직 문제는 당사자들이 오랜 기간 굉장한 고통을 받았다. 원인이 뭐든 간에 대승적 차원에서 풀어야할 시점이다.”

-최근 이동관 전 청와대 홍보수석 등은 현 정권에서 언론자유 후퇴는 없었다고 했다.
“그건 그분의 생각이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저와는 다른 세상에 사는 것 같다.”

-비판적 보수주의자, 보수적 자유주의자 등 자신을 일컫는 여러 수식어가 있다.
“보수적 자유주의자란 말은 김호기 연세대 교수가 붙여줬다. 그분은 내가 쓴 책을 모두 읽었다. 경향신문에서 ‘대화’ 코너를 같이 진행하면서 이야기를 많이 나눴다. 나로서도 생각지 못한 표현인데 나를 잘 알고서 한 것 같다.”

-자신은 어떤 의미에서 보수적인가.
“역사인식에서 그렇다. 고 리영희 교수의 ‘전환시대의 논리’ 등 진보 쪽과는 타협하기 힘든 장벽이 있다. 법학을 공부하며 자유민주주의적 가치를 체득했다. 1980년대 미국 유학 시절 영미 사회를 풍미했던 F. 하이에크와 밀턴 프리드만 등의 시장자유주의에 심취했던 것도 영향을 줬다. 그러나 시장자유주의는 30년 만에 벽에 부닥쳤다. 이제는 수정될 수밖에 없다.”

-그런 차원에서 우리 보수언론은 어떤가.
“언론은 자기 방향을 충분히 가질 수 있다. 사실과 의견을 구분하면서 사안에 대해 입장을 피력하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충격이었던 건 역시 4대강 문제였다. 4대강은 결코 끝이 아니라 또 다른 파문의 시작을 본격적으로 예고하고 있다. 이런 문제에 언론은 물론 지식인 사회, 전문 관료들이 침묵하는 것에 놀랐다.”



<저널리스트의 눈을 가진 법학자>
1960년 4월, 소년 이상돈은 충격적인 광경을 목격했다. 시민들이 태평로의 서울신문 사옥을 불태우는 모습이었다. 권력을 일방적으로 옹호하던 언론을 시민들이 단죄하는 역사의 현장에서 그의 언론관은 싹텄다. 1960년대 동아일보 편집국장을 지낸 고 김영상이 외가쪽 친척이다.

그의 외조부는 4·19혁명 후 민주당 서울시 참의원을 지낸 국내 최초의 서양화가 고 고희동 화백이다. 장면, 인촌 김성수와 친교를 나눈 외조부에게서 정치적 의식을 배웠다. 고교 시절에는 신동아를 애독하고 월터 리프만, 천관우, 선우휘를 선망하며 기자의 꿈을 키웠다.

대학에서 반 정부 시위에 가담하기도 했던 그는 미국 유학 시절 인식의 전환기를 맞는다. 레이건 정부 이후 미국의 변화를 지켜보며 시장경제와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확신을 가졌고 박정희 정권도 재평가하게 된다. 귀국해 교수 생활을 시작하면서 환경의 중요성을 일찍 깨닫고 기고 활동을 벌이다가 1995년 조선일보 비상임 논설위원으로 발탁됐다. 8년여 간 450여 편의 사설과 칼럼을 쓴 것이 법학자이면서도 저널리스트의 감각을 갖춘 그의 오늘을 있게 한 밑거름이 됐다. 2010년 3월부터 1년 간 기자협회보 ‘언론다시보기’ 필진으로 활약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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