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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故 기남도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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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들 “과묵하고 우직한 성격의 정의로운 기자”
기형도 시인과 먼 친척…막내딸은 기자 길 이어청계천 평화시장 노동자들의 비참한 실태를 보도했던 경향신문 고(故) 기남도 기자에 대해 지인들은 “정의로운 기자였다”고 입을 모았다.
기 기자는 1939년 1월 23일 전라남도 광주에서 태어나 광주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고려대 법과대학 행정학과에 입학했다. 외무고등고시에서 두 차례 낙방한 뒤 생계를 꾸리기 위해 1965년 12월 경향신문사 입사했다.
기 기자는 사회부에서 줄곧 기자생활을 했고 노동청을 10년 넘게 출입하며 노동문제에 관심을 가졌다. 기 기자는 1968년 강화도 내 인조견직물공장에서 벌어졌던 해고 사건에 대해 “아쉬운 기업의 아량”이라는 제목으로 기업의 행태를 비판했고, 1970년 10월 평화시장의 참상을 보도해 사회적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그동안 이 보도의 주인공이 알려지지 않았던 것은 해당 기자가 다칠 것을 우려해 기사에 이름을 넣지 않았던 이유가 컸다. 이후에도 기 기자는 1972년 9월, 법에 명시된 노동자의 단체교섭권을 근거로 악덕 기업주의 사례를 고발하는 등 노사관계 기사를 주로 썼다.
기 기자는 사내나 가정에서 활발했던 편은 아니었다. 기형도 시인과 먼 친척관계이기도 한 기 기자는 동료들로부터 조용한 기자로 기억됐다.
후배인 성정홍 전 경향신문 부국장은 “말이 없는 차분한 성격이었고, 취재할 때에도 말보다는 행동으로 보여줬다”고 회고했다.
후배인 김명수 신아일보 회장도 “자기 의지와 가치관이 강했고, 과묵하고 우직해 정의에 어긋난다면 생각하면 밀어붙이는 성격이었다”면서 “주변사람들과 잘 어울린 편은 아니지만 후배들을 많이 아꼈다”고 말했다.
이후 기 기자는 전두환 신군부의 언론통폐합에 의해 1980년 5월에 강제로 해직됐다. 이후 복직 기회도 있었지만 잇따른 군부정권의 폭압적 통치에 울분을 토로하며 기자에 미련을 버렸다. 그는 노동청을 비롯해 출입했던 곳을 토대로 사우디아라비아 등에 노동자 파견 사업을 했으나 뜻하는 대로 잘되지는 않았다.
기 기자는 2000년 10월 5일, 향년 62세의 나이에 숙환이었던 폐암으로 생을 마감했다. 슬하에 1남2녀를 두었고, 막내딸은 중앙일보 기선민 기자(문화부)다.
아버지에 이어 기자의 길을 걷고 있는 기선민 기자는 “대학시절 ‘전태일 평전’을 읽었지만 거기서 나오는 경향신문의 기사가 아버지의 기사일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며 “처음 알게 된 사실이라 놀랍다”고 말했다.
기 기자는 “아버지가 너무 힘들다는 이유로 기자가 되는 것을 반대하셨다”면서 “중·고등학교 시절 시국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하셨고, 신문과 자연스레 친해져 기자의 꿈을 꾸게 됐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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