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 신경민 MBC 논설위원 |
|
|
요즘 언론과 정치권에는 MBC 전 사장을 지냈던 엄기영씨의 강원도지사 출마 논란으로 소란하다. 방송사상 최장수 앵커가 홀연히 정치에 입문한다고 해도 찬반으로 시끄러웠을 것이다. 하물며 그를 밀어낸 세력에 자리를 구걸하는 형국을 보이니 갖은 욕을 퍼부었던 집권당과 보수세력은 암담해하는 반면에 자기편으로 여겼던 세력들은 허망해 한다.
그러나 함께 일해온 MBC의 선후배들은 당혹스럽지만 혼란스럽진 않다. 이런 미래를 예견했기 때문이다.
우리 방송은 이런 방송인을 다시 배출할 수 없다. 아무도 그처럼 마흔을 앞둔 젊은 앵커로 들어가 화려하게, 오랫동안 스튜디오를 지킬 수 없다. 설혹 지킨다 해도 그처럼 국민의 사랑을 담뿍 받을 수 없다. 또 그처럼 보도국장, 본부장, 사장 등 요직을 두루 경험할 수 없다. ‘제 2의 엄기영’은 나올 수 없다.
엄기영씨가 화려한 장수와 출세를 누린 이유는 많다. 수려한 외모와 드문 미성으로 남녀노소에게 파고들었고 실질적으로는 권력을 포함해 누구에게도 목소리를 높이지 않아 적을 만들지 않았다. 그런 탓에 그는 민주화 이후 13년 동안 국민과 호흡하면서 앵커의 이미지를 주었지만 의미 있는 말을 선물하지 못했다.
굳이 어록을 들자면 “어처구니가 없습니다”가 거의 유일하다. 모진 소리를 하지 못하는 좋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이런 점은 엄기영씨의 천성에서 비롯한다. 속마음을 절대로, 끝까지 내놓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동조했다. 그래서 나쁜 짓에 앞장서지 못했지만 옳은 일에 앞장서지도 않았다. 종국에는 올바르고 바람직한 결정보다는 당시 유리하다고 여겨지는 결론을 택했다. 지독한 망설임과 속내 감추기로 ‘엄 햄릿’, ‘엄큼이’라고 불리었다.
앵커 전후해서 엄기영씨는 회사 내외의 권력을 따랐고 사장 이후에는 일관되게 자리 지키기에 유리한 쪽을 택했다. PD수첩 방송에 대한 즉각 사과, 앵커와 백분토론 손석희 교수의 교체 등으로 분명히 나타났다.
다만 그는 심하게 표 나는, 올바르지 못한 짓을 선뜻 하지 못하고 항상 망설였다. 고뇌하는 몸짓을 보인 탓에 보수와 진보는 보고 싶거나 보기 싫은 대목을 각각 확대해서 취한 뒤 아전인수로 우군이거나 적이라고 마음대로 재단했다. 특히 권력과 보수의 일부는 더 급진적이고 신속한 조치를 원한 나머지 그에게서 나타나는 질적, 양적, 시간적 격차를 비난했다.
이해하지 못할 대목은 2010년 2월 방문진과의 불화 끝에 엄 사장이 퇴임하던 날이었다. 회사 현관에서 농성 중이던 노조 집행부에 손 하트를 만들면서 회사미래를 당부했다. 선후배들은 지금도 이 제스처가 즉흥적이었는지, 의도적이었는지 궁금하게 여긴다. 다만 이 제스처가 당시 그에게 유리했을 것으로 본다.
정치입문 과정에서도 엄기영씨는 망설이는 듯하면서 유리한 쪽으로 행보를 취했다. 지방선거 이전에는 당선 가능성이 희박한데다가 성향에 맞지 않는 야당의 출마제의를 언론인으로 남겠다면서 거부했다. 야당 도지사의 정치생명이 시한부에 들어서자 재빨리 강원도로 주민등록을 옮겼고 정치입문이 분명한 상황에서 이를 부인했다. 이미지만 아는 사람들은 다시 인식의 혼란을 겪었지만 그 나름으로 일관된 행보였다.
엄기영씨는 장수앵커이기 이전에 어느 정당으로나 출마할 수 있는 국민이다. 그는 좋은 인간이고 지금의 행보는 지인에게는 예측 가능했다. 다만 본인이 만들고 적극 활용해 온 이미지와 실체가 너무 다른 나머지 우리 사회의 어느 쪽으로부터도 이해와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특이한 사례에서 우리는 이미지와 실체가 도저히 만날 수 없는 간극을 본다. 내실을 갖지 못하는 이미지를 몇 십 년 묵히거나 그럴 듯하게 포장해도 이미지일 뿐 실체가 될 수 없다. 연기파 앵커가 이미지만을 팔 경우 (연예인이 아닌 뉴스앵커가 이미지와 말만을 팔아도 좋으냐는 논란은 접어두자.) 이 간극은 현실에 큰 영향을 주지 않는다. 그러나 정치인일 경우 얘기는 달라진다. 정치와 선거는 이미지와 퍼셉션(Perception:知覺)을 파는 사업이라고 하지만 정치세계에서 간극이 클수록 모두가 불행해지고 여파는 국내외, 전후좌우, 현재와 미래로 퍼져 나간다. 그래서 정치가 이미지를 심하게 팔더라도 언론은 실체를 묻고 파헤쳐야 한다. 그것이 언론의 원칙이자 임무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 강원도 선거에서 이미지와 실체 중 어느 쪽이, 얼마나, 어떻게 지배할지 언론인으로서 궁금하다. 선거 과정과 그 이후 엄기영과 강원도, 그리고 우리 정치와 언론에 줄 영향도 궁금하다.
신경민 MBC 논설위원의 전체기사 보기
Copyright @2004 한국기자협회.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