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을, 진실을 보도해주십시오"

동백림 사건 이수길 박사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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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수길 박사는 1965년 동백림 사건에 연루돼 고문으로 평생을 휠체어에 의존하게 됐다.  
 


지금 이 순간이 정녕 꿈이기를….


나는 서울의 거리를 걷고 싶다. 햇살 부서지는 명동이 그립다.


나와 같은 피부색을 지닌 그 사람들이 보고 싶다.


멋적게 웃지만 깊숙이 정이 베어드는 내 동포들의 미소가 눈가를 적신다.


나는 라인강의 나라에서 의술을 배워, 정겨운 도시와 사람들 사이에서 의사로서, 남편으로서, 아빠로서 행복하게 살고 싶었다. 꿈이라면 그뿐이었다.


그런데 이 사나이들은 나를 간첩이라고 한다. 북의 지령을 받고 공작금을 접수했다고 한다. 간첩단의 두목이라고 한다.


북한 사람을 만난 적 없다. 북한 대사관이 어디 있는지도 모른다. 더욱이 동베를린은, 평양은 내게는 단순한 활자이자 지명일 뿐, 그 이상의 의미가 아니다.


사실대로 불지 않는다고, 독종이라고, 이제는 날 총살 시키겠다고 유언을 하라고 한다.


그들이 천으로 막아버린 내 눈앞 암흑 속에 사랑하는 그녀와 두 아이의 얼굴이 피어난다.
그날 느낀 체온이, 그날 나눈 웃음이 정녕 이승에서의 마지막 순간이었단 말인가.
처음 마시는 낯선 공기, 이곳은 내가 살던 세상이 아닌 듯하다. 이곳은 어디인가. 지옥인가.
사랑하더라도 언젠가는 이별해야 한다. 하지만 왜 지금 우리를 짓밟는가. 왜 아프게 하는가.


저들은 누구를 위한 정부인가.

(위 글은 1965년 6월25일, 독일에서 중앙정보부 이문동 청사로 납치된 이수길 박사가 고문과 총살 위협 속에 조사를 받던 일화를 재구성한 것이다.)

강제로 사선(死線)을 밟았던 사람. 그러나 아무런 잘못도 없었던 사람. 그 이후에도 조국을 빼앗긴 채, 꿈을 파괴당한 채, 고통만 물려받은 사람. 그 사람이 팔순을 문턱에 둔 나이에 비로소 강탈당한 자신의 삶을 되찾으러 나섰다. 


1960년대 정부차원의 간호사 독일 파견의 산파였던 이수길 박사(78)는 1965년 동백림 사건에 연루돼 중앙정보부의 비인간적인 고문을 받았다. 물론 무혐의 처리됐다. 그러나 그는 여생 동안 휠체어를 육신의 일부로 받아들여야 했다. 선진국에서 배운 의술을 조국에서 펼치려던 꿈은 산산조각 났다. 타의로 정든 조국 강산을 등져야 했다. 삶의 꿈과 목표는 일그러졌다. 소박했던 한 인간의 삶과 꿈을 누가 이토록 유린했는가. 그것은 바로 국가권력과 언론권력이었다. 그 권력들은 그 뒤로도 한 번도 그의 상처를 쓰다듬은 적 없다. 오히려 죄악을 반복했을 뿐이다.


상처만 남은 이수길 박사를 찾아가는 길은 거짓말처럼 고요했다. 기자를 반갑게 맞이하는 그의 미소에서 지난 세월의 모진 풍파를 읽어내기란 어려웠다. 그러나 마음마저 웃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한 인간에게서 평화를 근원적으로 앗아가 버린 권력의 폭력. 그 돌이키고 싶지 않은 기억 속으로 그는 여행을 떠났다.

-1964년 독일에 가기 전까지 우리나라에서 개업의로서도 성공하셨다고 들었습니다.
1958년 명동 한일관 뒤에 이수길의원을 열었습니다. 서울역에 서울세균검사소도 운영했지요. 일화를 하나 말씀드릴게요. 당시 서울에서는 종로의 이정재, 명동의 이화룡이 주먹세계를 양분하고 있었어요. 이수길의원은 이화룡파의 단골병원이었습니다. 싸움을 하다 다치면 치료를 받고 진단서를 끊어가기도 했죠. 일반 환자도 굉장히 많았어요. 이름이 알려지자 동아일보, 한국일보, 여성지 여원 등에서 의뢰를 해와서 의학칼럼을 썼죠. (의사검정시험 출신의 한계를 느낀 이 박사는 의과대학 졸업장을 받기 위해 1964년 독일 유학길에 올랐다.)

-독일에 가셔서 정부 차원의 간호사 독일 파견 사업에 공헌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간호사 파견 사업은 어떻게 추진된 겁니까.
1965년 당시 독일은 3만명 정도의 간호사 인력이 부족했습니다. 2만개의 병상을 돌보지 못하고 있었어요. 한국에선 간호전문대를 졸업한 학생들이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는 상태였고요. 그래서 간호사 독일 파견을 국가적 사업으로 추진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민당이 주정부를 꾸린 헤센, 프랑크푸르트 주에 직접 편지를 보내 허락을 받아냈습니다. 친분이 있던 이만섭 의원(전 국회의장)이 당시 오원선 보사부 장관과 연결시켜줬어요.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의 힘도 컸다던데요.
김 부장이 많이 도와줬지요. 김 부장이 5.16 후 1962년 최고회의 운영위장으로 프랑크푸르트를 방문했어요. 그때 전 프랑크푸르트대학병원에서 유급조교로 일했죠. 현지 동포 중에서 차를 갖고 있는 사람이 저밖에 없어서 2~3일간 김 부장을 태우고 다니면서 안내를 했어요. 그게 첫 만남이었습니다. 간호사 파견 사업을 추진하다가 정부와 의견 차이가 생겼을 때도 김형욱 부장이 중재를 해줬습니다.

-박정희 대통령도 만나셨습니까.
한번 만났습니다. 김 부장이 박정희 대통령과 독대하게 해줬어요. 그해(1965년) 12월인데요. 청와대에서 40여분 정도 만났습니다. 제가 긴장하니까 박 대통령이 독일 방문했을 때(1964년) 만났던 기억을 떠올리며 분위기를 풀어 주더군요. “지팡이 짚고서도(이 박사는 소아마비를 앓았다) 유능한 의사라고 해서 감명 받았습니다”라고요. 또 제가 소아마비 전문가인 걸 알고 종이와 펜을 가져오더니 소아마비의 원인을 그림으로 그려 설명해달라고 하더군요. 굉장히 성심성의껏 들었습니다. 그리고는 "이 박사. 우리 간호사들이 독일에 가면 대우를 어떻게 받습니까“ 물었습니다. 저는 독일 간호사들과 같은 의무를 갖고 대우를 받는다고 대답했습니다. 간호사 파독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도와주겠다고 했습니다.

-동백림 사건에 연루됐는데 최종 법적 처리는 어떻게 됐습니까. 
중앙정보부에서 조사를 받고 무혐의 처리됐습니다. 당시 독일에서 16명이 납치돼왔는데 저를 포함해 5명이 무혐의로 풀려났어요.


제 혐의는 북한의 지령으로 간호사들을 독일로 끌어들였다는 거에요. 적화사상을 주입하려고요. 그리고 동포들 앞에서 동독을 찬양했다는 겁니다. 물론 다 거짓말이었지요. 폭설에 고속도로에서 길을 잃었다가 동독 경찰이 도와줘서 위기를 모면한 적이 있는데 그 얘기를 동포 모임에서 했던 게 전부에요. 또 파독된 간호사들에게 북한 선전물이 배달된 적이 있었는데 저는 연방수사청에 신고해서 이런 일이 없도록 해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걸 제가 뿌린 것으로 몰아갔던 겁니다. 제 무고함은 독일에 돌아와서 연방수사청의 조사를 받으면서 다시 확인됐습니다.

-당시 독일에서 중앙정보부 요원들에게 ‘납치’됐다고 하던데요.
주독 한국대사관에 정보부에서 파견된 Y 참사관이라고 있었습니다. 저희 부부와도 친하게 지냈죠. 그와 H 정보부 1국 차장, 그리고 안면이 없는 직원 한사람이 1967년 6월20일 제 집을 찾아왔어요. 집에서 저녁을 대접했더니 “2차 가자”고 하더군요. 2차로 근방의 카지노에 갔다가 나오는데 “시간이 늦었으니 대사관에 가서 기사를 불러주겠다”고 해서 본에 있던 대사관에 갔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Y 참사관과 H 차장은 없어지고 옥상의 방에서 기다리라고 하더니 40대 정도 된 수사관이 들어왔어요. 당신이 간첩 혐의가 있으니 한국에 가서 해명하라는 겁니다. 전 갈 수 없다고 버텼죠. 그러자 구타가 시작됐습니다. 제 지팡이를 뺏어서 내리쳤습니다. 왼손으로 막다가 손가락 뼈가 부러지고 결혼반지도 없어졌습니다. 피투성이가 돼서 가겠다고 하니까 그제서야 멈추더군요. 그가 나가고 서씨라는 수사관이 들어오더니 피를 닦아주며 측은하다는 듯 말했습니다. “이 박사, 왜 괜히 고집부려서 고생입니까”라고요. 그 뒤 아침 7시쯤 출발해 4시간을 달려 함부르크에 있는 공항에 도착했어요.

-가족에게 알리지 못했습니까.
(부인 이영자 여사) 물론이죠. 날이 밝아도 애 아빠가 들어오지 않으니까 대사관에 전화를 했어요. 아무도 안 받더라고요. 마인츠대학병원장(당시 이박사가 근무 중이던 병원)께 전화를 했죠. 우리 양반은 핸디캡(장애)이 있으니까 간밤에 혹시 그런 피해자가 있는 교통사고가 있었는지 알아봐달라고요. 그런데 없다는 거에요. 사흘이 지나고 나선가, Y 참사관과 통화가 됐어요. 오히려 화를 버럭 내면서 “여자가 말이 많다. 가만히 있어라”라는 식으로 윽박지르는 거에요. 남편이 납치됐다는 건 독일신문에서 보도를 보고 알았어요.(한국 언론에는 전혀 보도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독일연방수사청 수사관들이 와서 “당신 남편이 한국에 납치됐다, 우리가 신변보호를 해주겠다”고 했어요.


(이 박사) 서울 후암동에 사시던 아버지께 제 반공법 위반 구속통지서가 날아왔어요. 그게 6월30일이에요. 그때 가족들이 정확하게 알게 됐죠.

-중앙정보부 조사 과정에서 고문을 당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공항에 내리니까 비행기 바로 옆에 엠뷸런스가 대기하고 있더군요. 같이 독일에서 연행된 두 사람과 그 차를 타고 중앙정보부 이문동 청사로 갔죠. 도착하자마자 지하실로 내려갔더니 L 당시 수사과장이 있더군요. 커피를 한잔 주더니 요원 기숙사로 데려가서 조사를 시작했어요. 그때부터 이문동과 남산 청사를 드나들며 10일 간 조사하면서 고문을 10차례 정도 당했어요. 물고문과 전기고문을 번갈아 받았어요. 전기고문을 하는데 소아마비로 움직이지 않는 한 쪽 다리가 반응이 없으니까 전기가 약해서 그런 줄 알고 더 강도를 높이는 거에요. 그래서 나중엔 멀쩡했던 나머지 다리까지 마비가 됐죠. 변호사는 물론 외부와 연락이 단절된 건 당연하고요.

-고문을 했던 사람들을 기억하십니까.
남 영감이라고 부르는 50대 남자와 상사라고 칭하던 30대 깡마른 남자를 비롯해 4~5명이 같이 저를 고문했습니다. 고문은 안했지만 저를 담당했던 L모 수사관도 있었고요.

-그들을 용서하십니까.
그 사람들 자체가 나쁜 사람이겠습니까. 일이었을 뿐이죠. 위에서 시키니까 했겠죠. 원한은 없습니다. 지금은 다 용서할 수 있습니다.

-무혐의 처리됐다고 하는데, 왜 이 사건에 말려드신 겁니까.
당시 몇몇 유학생이 동베를린과 북한을 드나든 건 사실입니다. 그들이 고문을 당하면서 주위 아는 사람의 이름을 댔고 중앙정보부가 모두 붙잡아 들여 간첩단 사건을 만든 거지요.


시작은 유학생 L모씨의 자백이었습니다. 1967년에 조선일보 이기양 기자가 체코 프라하에서 열린 세계농구선수권 대회를 취재하다가 실종됩니다. 한국에서는 그를 구출하자고 백만인 서명운동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L씨는 동베를린 북한대사관을 드나들면서 대학 동창인 이씨를 소개시켰거든요. 처지가 곤란해진 그는 평소 친분이 있던 육영수 여사의 친척에게 자신의 행적을 실토합니다. 그가 동베를린과 평양을 방문한 적 있는 사람들을 정보당국에 알려주고, 그들을 고문하는 과정에서 같은 동네 살던 유학생과 동포의 이름이 나온 게 아닌가 싶어요. 그 인원이 1백94명에 이르렀습니다. 그중에 제 이름도 있었던 겁니다.

-한국에서 풀려나 독일에 와서 기자회견을 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 자리에서 납치된 게 아니라 자발적으로 한국에 갔다, 고문은 없었다고 말했다는데요.
맞습니다. 사실대로 얘기했다간 평생 한국에 돌아가지 못할 거 같았어요. 한국에 있는 부모 형제 생각도 했습니다. 한국과 독일의 수교도 깨질 수 있었고요. 제가 말한다고 해도 당시 군정 치하에서 갇힌 사람들이 풀려날 리가 없었어요. 동백림 관련자들이 당시 2년 사이 모두 석방됐는데, 만약 제가 그때 중정에 납치돼 고문당했다고 했으면 그 사람들이 풀러나기도 어려웠을 거고요. 얼마 전 공개된 외교문서에서 동백림 사건 관련자 석방은 한-독 양국의 외교 협상에 의한 것이라는 게 드러나기도 했습니다.

-누가 기자회견을 주선하거나 강요하지는 않았는지.
강요당한 건 없습니다. 중앙정보부에서 서대문형무소로 이감됐다가 무혐의가 드러난 뒤 사보이호텔에 연금돼있었는데요. 출국 이틀 전에 페링(Ferring) 당시 주한독일대사를 만났습니다. 그가 그러더군요. “이 박사. 겉옷보다 속옷이 몸에 더 가깝습니다.” 당신의 조국은 결국 한국이니 말 조심해야 한다는 의미였죠. 그리고 비행기를 갈아타러 일본에 잠시 머물다가 ‘빌트 차이퉁’의 독일인 기자를 만났습니다. 독일 언론이 매일 내 문제를 대서특필하고, 국회에서 야당이 한국과 수교를 끊어야 한다고 주장한다고 알려주더군요. 지금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기자 백여명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는데, 이건 국가적인 문제니까 말조심해야 한다는 충고도 했습니다.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이 이 박사에게 보낸 친필 편지. 김 전 부장은 이 편지에서 "대단히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김형욱 부장이 이 박사께 편지를 보내 동백림 사건과 관련, 사과를 했다던데요.
그랬습니다. 김 부장은 저와 원래 그런 사이가 아니었습니다. 김 부장 아들이 어려서 지뢰를 밟아 발가락 2개를 잃었는데 제가 치료도 도와줬고요. 정보부에 들어간 뒤 독일에 왔을 때 만나 식사를 하기도 했습니다. 조사가 끝난 뒤 불러서 직접 만나기도 했고요. 사건이 난 뒤 8월에 친필 편지를 보내 “대단히 미안하게 생각한다”고 하더군요. 제가 이후에 심장기형아동수술 사업을 시작할 때 김 부장이 장기영 당시 한국일보 사장을 소개시켜주기도 했습니다. 그가 실종되기 4~5년 전까지 연락이 닿았습니다. 부인은 지금 미국에 사는데 10년 전 쯤 통화했고요.

-동백림 사건 수사는 누가 주도했습니까. 김형욱 부장입니까.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지시해서 김형욱 부장이 수사했고, 주위 참모들이 부풀린 거라고 봅니다. 당시 6.8 부정 선거 시비가 일 때였는데 동백림 사건 뒤 국민의 관심에서 멀어졌습니다. 당시 정부 내에도 국제법 위반 등 시비가 일 수 있으니 좀 더 지켜보자는 의견과 철저히 조사하자는 쪽이 부딪힌 걸로 알고 있습니다. 김형욱 부장의 실각을 노린 세력이 저를 표적으로 삼았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김 부장이 저를 대통령에게도 소개했는데, 간첩이라면 그에게도 큰 타격이 될 테니까요.

-독일에 돌아온 뒤 유럽 내 반정부 인사들 중심으로 이수길 추방운동이 있었다던데요.
그랬죠. 저를 배신자라고 했죠. 기자회견에서 고문과 납치 사실을 부인했으니까요. 독일 좌익신문인 ‘프랑크푸르트 룬데사우’가 주축이 돼서 저를 몰아내려고 했습니다. 그 와중에도 상처를 많이 받았습니다. 1992년 한인 성당에 나가기 전까지는 한국 사람들과 왕래를 거의 끊었을 정도니까요. 한국 사람이 무서워서 만날 수가 없었어요.

-윤이상 선생도 동백림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셨는데 원래 잘 아는 사이셨나요.
전부터 아는 사이였죠. 사건 뒤엔 연락이 끊겼다가 1980년대인데…. 독일에서 윤이상음악회가 열릴 때 찾아가서 한번 만난 적이 있습니다. 부인 이수자 여사도 같이 봤죠. 좀 서먹서먹했죠. 그때 이 여사가 “이 박사는 평양도 간 적 없는데 고생하셨네요”라고 말했습니다. 그게 마지막이었습니다.

-그때 국내 언론은 동백림 사건을 어떻게 보도했나요.
당시 저를 취재하러 온 한국 기자는 전혀 없었습니다. 우리나라 언론의 보도는 중앙정보부가 동백림 간첩단 사건을 공식 발표할 때나, 제가 독일에 와서 기자회견 했을 때 그 내용만 그대로 받아 실은 것 외엔 보지 못했습니다.

-그럼 언제부터 침묵을 깨고 사실을 알려야겠다고 생각했습니까.
1993년 KBS에서 주는 제1회 해외동포상을 받았습니다. 그때 귀국했다가 김영삼 대통령을 접견했는데 그 자리에서 수석공보비서관이 “이 분이 동백림 사건으로 고생하셨습니다” 말을 꺼냈습니다. 김영삼 대통령은 “이 박사, 다음부터는 이런 일이 없을 겁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아, 이제는 말할 수 있겠구나 싶어 1997년에 자서전도 내고 제 억울한 삶을 이야기하기 시작했죠. 그 이후부터 조금씩 취재하러오는 언론도 생겼습니다. 1998년엔 김수한 추기경께 영세를 받았습니다. 상처도 조금씩 치유되더군요.

-이 박사께서는 1960년대 한국 간호사 독일 파견 사업이 국내에서 왜곡되고 있다고 주장하시고 계십니다.
(앞서 말한 대로)간호사 파독은 독일 주정부는 물론, 김형욱 부장과 이만섭 의원의 도움으로 제가 보사부와 직접 교섭해서 추진한 일입니다. 그런데 한국 중소기업의 독일 투자를 알선하는 일을 하던 P모씨가 이 사업을 자신이 박 대통령에게 건의해서 이뤄낸 것이라고 자서전에서 주장했습니다. 당시 독일로부터 상업차관을 얻는데 광부, 간호사를 독일에 보내 그 월급을 코메르츠방크에 입금시켜 담보를 대신했다는 거죠.


그런데 이건 전혀 사실이 아닙니다. 독일 차관은 1961년 12월 재건 차관 명목으로 집행됐습니다. 1억5천만 마르크였죠. 그런데 이건 장면 정권 때부터 추진된 겁니다. 재건 차관은 한국을 포함해 32개 약소국에게 지급됐습니다. 1억5천만 마르크 중 7천5백마르크는 현금 무이자로 빌려줬고, 나머지는 독일에서 재건에 필요한 물품을 사가는 대신 재정을 보증해주는 형태로 지급됐습니다. 그러니 별도의 담보나 보증이 필요 없었죠. 광부와 간호사들의 월급을 담보로 차관을 받았다는 건 맞지 않습니다.


또 1964년 박정희 대통령이 서독에 왔을 때 환영 나온 광부와 간호사를 보고 눈물을 흘리자 뤼프케 당시 서독 대통령이 눈물을 닦아주며 도와주겠다고 약속했다는 일화도 소개되고 있는데요. 이것도 사실이 아닙니다. 당시는 간호사 파독 전이라 간호학교에 다니던 학생들 몇십명 밖에 없을 때입니다. 당시 외무부 장관이던 이동원씨도 한 신문사에 기고한 글에서 이후락 비서실장이 독일 방문 뒤 독일 정부의 영접이 형편없었다며 주독 대사를 해임시키려 해서 마찰이 있었다고 밝혔습니다. 그만큼 대접이 좋지 않았다는 얘기죠.(시사저널 850호는 당시 박정희 대통령과 뤼브케 대통령의 만남은 공식 만찬 한번 밖에 없었다고 보도했다)


P씨도 작년 11월 시사저널과의 인터뷰에서 사실이 아니라고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왜곡된 주장을 2003년 국내 모 유력 일간지 칼럼에서 K 논설주간이 그대로 받아쓰기도 했습니다. K 전 육사 교장도 2004년 육사 졸업식 연설에서 이 일화를 인용했고요.

-그렇다면 왜 왜곡이 이뤄지고 있다고 보십니까.
간호사 문제를 통해서 박정희 신드롬을 만들려고 하는 거겠지요.

-올 1월 국정원 과거사위원회가 동백림 사건에 대한 진상을 조사해 발표했는데요, 발표 내용은 사실입니까


   
 
  동백림 사건 당시 자신을 취재한 기자는 한명도 없었다는 이수길 박사는 언론에게 진실과 사실을 보도해줄 것을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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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습니다. 당시 북한이나 동독을 드나들며 실정법을 위반한 사람이 있었던 건 사실이죠. 그렇지만 그걸 너무 과장했다고 봅니다. 그러나 진상 발표 뒤 피해자들에 대해서 아무런 보상이나 조처가 없었습니다. 전혀 무고한데도 납치돼 고초를 겪은 저를 포함한 5명에 대한 언급도 별로 없었습니다. 그중엔 이미 죽은 사람도 있고요. 간호사 출신인 P씨는 동백림 사건 뒤 뒤 한국 사람과 교류를 끊고 일본인, 중국인과 결혼해 살았습니다. 물론 한국에도 못 나오고 있습니다. 한번 간첩으로 몰리면 무혐의 처리가 돼도 회복되기가 어렵습니다. 그들의 삶을 보상해줘야 하지 않습니까.


당시 유학생들은 국가적 엘리트들이었습니다. 귀국했으면 크게 성공할 수 있었던 사람들이었죠. 그런 사람들의 인생이 동백림 사건으로 어긋나게 된 겁니다. 저도 검정시험 자격 의사로서는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독일에 가서 대학 학위를 받고 귀국하려 했던 겁니다. 그 사건 이후 전 독일 국적을 취득했습니다. 군사정권 아래서 누가 내 신분을 보장해줄 수 있을까 무서웠기 때문입니다.

-최근에도 그렇고 그 뒤로도 많은 간첩단 사건이 발표됐습니다. 이런 사건을 접할 때마다 어떻게 느끼십니까.
동백림 사건 2년 뒤 소(小) 동백림 사건(1969년 국회간첩단 사건을 말함)이 터집니다. 당시 공화당 국회의원이었던 김규남과 법학자인 박노수가 간첩으로 몰려 사형까지 당합니다. 중앙정보부에서 살해당한 서울대 최종길 교수(1973년 의문사)도 동백림 사건의 여파로 비극을 맞았습니다. 이 사람들도 매우 억울했을 겁니다. 간첩단 사건을 보면 언론이 정부나 당국의 발표와 주장을 그대로 받아쓰는 게 대부분입니다. 그게 진실이라고 볼 수 없거든요. 자체적으로 취재를 해서 진실을 밝히는 게 중요하다고 봅니다.

-앞으로 계획을 말씀해주시죠.
변호인단을 꾸려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할 계획입니다. 일생을 국가를 위해 공헌하려 했는데 오히려 고통 속에 살았습니다. 남은 문제가 해결되면 여생은 조국에 돌아와 살고 싶습니다. 보상금을 받는다면 한독협회와 한국기자협회에 전액 헌금할 생각입니다. 언론이 제대로 보도했더라면 이런 고통이 없었을 수도 있었습니다. 앞으로는 공정 보도를 해달라는 바람에서 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언론에게 부탁하고 싶습니다. 올바른 역사를 알려주십시오. 진실을, 사실을 보도해주시기 바랍니다.



*동백림 사건이란

1967년 7월8일 중앙정보부는 일부 독일 및 프랑스 유학생 및 교민이 북한의 공작에 따라 반국가 간첩 활동을 벌였다고 발표했다. 혐의자 명단에는 음악가 윤이상, 화가 이응로, 시인 천상병 등이 포함됐으며 최종 34명이 유죄판결을 받았다. 그중 정규명 정하룡에게 사형이 선고됐다. 그러나 대법원은 이들에 대해 간첩죄는 적용하지 않았다. 정부는 1970년 8.15를 맞아 동백림 사건 관련자들에 대한 형 집형을 모두 면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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