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일 열린 제37회 한국PD대상 시상식에서 ‘흑백요리사’를 제작한 윤현준 스튜디오 슬램 대표가 EBS ‘저출생·인구위기 대응 프로젝트 TF’와 함께 올해의 PD상을 공동 수상했다. 올해의 PD상은 대상 격에 해당하는 상으로, 한국PD대상 최고 영예다.
이 상을 지상파 방송사에 소속되지 않은 PD가 받은 것은 역대 세 번째다. 2010년과 2020년 독립PD가 받은 적이 있는데, 모두 다큐멘터리로 상을 받았고, 2010년 수상 PD들이 만든 작품은 지상파인 KBS에서 방영됐었다.
이번 윤현준 대표의 수상이 이례적인 건 방송사에 소속된 PD도 아닐뿐더러, 넷플릭스 오리지널 예능으로 받은 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온라인동영상서비스, 즉 OTT 오리지널 콘텐츠로 올해의 PD상을 거머쥔 첫 사례가 되는 셈이다.
윤현준 대표는 KBS 예능 PD 출신으로 JTBC에서 ‘크라임씬’, ‘싱어게인’, ‘효리네 민박’ 등 히트작을 여럿 만들고 2020년부터는 JTBC 스튜디오 산하 제작 레이블인 스튜디오 슬램을 이끌고 있다. 지난해 9월 넷플릭스에서 공개한 ‘흑백요리사: 요리 계급 전쟁’이 돌풍을 일으키면서 넷플릭스 글로벌 톱10 TV(비영어) 부문 1위를 차지하는 등 각종 기록을 썼다. 이에 힘입어 OTT 예능 제작자로선 처음으로 지상파(계열 포함) PD들이 다수인 한국PD연합회에서 주는 PD대상 최고상까지 받았다.
하지만 앞으로는 이런 사례가 드물지 않을 것이다. 이미 모든 플랫폼을 망라해서 한 해를 대표하는 콘텐츠를 꼽을 때 ‘비지상파’ 제작물이 상위에 포진한 지는 오래됐고, OTT 오리지널이 1위를 차지하는 일도 많아졌다. 넷플릭스, 유튜브 같은 OTT를 방송과 구분하는 일 자체가 의미 없어진 셈이다.
일례로 넷플릭스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는 한 번도 TV에서 방영된 적이 없는데 공개 직후부터 그야말로 ‘국민 드라마’ 반열에 올랐다. 한국갤럽이 3월20일 발표한 ‘좋아하는 방송영상프로그램’ 조사에서도 ‘폭싹 속았수다’는 1위를 차지했다. 2013년부터 ‘좋아하는 TV프로그램’을 조사해 발표해 온 한국갤럽은 2023년부터는 TV뿐 아니라 OTT 프로그램까지 범위를 넓혀 조사하고 있다.
이런 변화는 시상식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종합예술상인 백상예술대상은 5월5일 열리는 제61회 시상식부터 기존의 ‘TV 부문’ 명칭을 ‘방송 부문’으로 변경해 시상한다. 그동안 지상파에서 케이블, 종편, OTT로 심사 범위를 확대해 온 백상 측은 2년 전인 59회 시상식부터 예능 부문 심사 대상에 웹 콘텐츠와 크리이에터까지 포함한 바 있다.
앞서 지난해 열린 60회 시상식에서도 TV 부문 수상작(자) 15편(명) 중 대상 포함 6편(명)이 한 번도 TV에 방영되지 않은 OTT 제작물이었다. 올해에도 드라마 부문 후보 5편 중 2편, 예능 5편 중 3편, 교양 5편 중 2편이 OTT와 웹 콘텐츠다. 엄밀히는 ‘방송’이 아닌 콘텐츠가 방송 부문 후보 절반을 차지한 것이다. 올해 예능 작품상 후보엔 지상파 프로그램이 아예 없다.
‘규제 밖’ OTT 훨훨 나는데, 방송법 여전히 20세기에
방송은 이미 많은 부분에서 OTT 등에 밀리고 있다. 지상파와 종편에서 꾸준히 사랑받는 프로그램은 트로트 경연 등 장수 예능과 일일·주말드라마밖에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콘텐츠와 플랫폼 자체의 경쟁력이 떨어지면서 광고 경쟁력도 뒤처지고 있다. ‘2024년도 방송시장 경쟁상황 평가’ 보고서에 따르면 방송광고가 OTT 광고보다 우월한 게 그나마 주목도와 커버리지뿐인데, 그 응답마저도 2016년 대비 13%포인트 넘게 줄었다.
상황이 이러니 지상파, 유료방송 할 것 없이 방송사업자들이 한목소리로 ‘규제 완화’를 부르짖고 있지만, 정책당국은 말뿐 실천이 없고, 이제 와서 규제를 대폭 완화한다고 해도 언 발에 오줌 누기에 불과하다는 회의 섞인 전망도 있다.
이런 와중에도 기존 법·제도 틀 밖에 있는 글로벌 OTT 사업자들의 국내 방송시장 잠식 속도는 빨라지고 있다. 넷플릭스가 국내에 진출한 지 만 9년, OTT를 포괄하는 통합 방송법 또는 통합 미디어법제가 필요하다는 제안이 학계 등에서 나온 지도 그 이상의 시간이 지났다. 재미있는 콘텐츠는 OTT가 무한정 제공할 수 있겠지만, 방송에 부여된 공적 책무와 공공성까지 OTT에 기대할 순 없다. 과연 새 정부에선 방송제도 개선이라는 해묵은 과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조기 대선에 따라 빠르게 흘러가는 대선 시간표 속에서 미디어 정책 과제들이 빼놓지 않고 다뤄지게 될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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