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치도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다. 초유의 위헌적·위법적 비상계엄으로 파면된 전직 대통령은 끝내 사과 한마디 없이 관저를 떠났다. 헌법재판소가 탄핵을 선고한 지 173시간 하고도 47분 만이었다.
마치 선거 유세를 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어느 모로 봐도 탄핵된 대통령이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물러나는 모습은 아니었다.
11일 오후 5시9분, 경호차를 타고 관저 정문쯤 도착해 차에서 내린 윤석열 전 대통령은 환한 얼굴로 기다리던 지지자들에게 인사했다. 손을 흔들고,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기도 했다. 그러다 지지자들 가까이 다가갔다. ‘과잠’이라 불리는 대학 점퍼를 입은 청년 지지자들이 앞에 기다리듯 서 있었고, 윤 전 대통령은 이들과 악수하거나 포옹을 하기도 했다. 일부 청년들은 오열하며 윤 전 대통령을 연호했다.
그렇게 4분 정도 지지자들과 인사를 나눈 윤 전 대통령은 뭔가 얘기를 하고 싶은지 마이크를 찾는 듯하다가 5시13분쯤 다시 차에 올라 탔다. 차가 도로를 달리기 시작하고 나서도 한동안 창문을 연 채 손을 내밀어 흔들거나 주먹을 불끈 쥐었다.
경찰 등 경호 속에 윤 전 대통령 부부가 탄 차는 출발한 지 17분 만인 오후 5시30분 서초동 사저에 도착했다. 이곳에서도 윤 전 대통령은 차에서 내려 지지자, 주민들과 한동안 악수하며 인사를 나눴다.
8년 전 국정농단 파문으로 탄핵된 박근혜 전 대통령도 청와대를 나와 삼성동 사저로 돌아간 뒤 환한 얼굴로 지지자들과 인사를 나눴지만, 이렇게 선거 유세를 하듯 요란한 모습은 아니었다. 또 박 전 대통령 역시 “진실은 반드시 밝혀진다”며 탄핵에 승복하지 않았지만, “대통령으로서의 소명을 끝까지 마무리하지 못해 죄송스럽게 생각한다”며 적어도 미안한 감정은 비쳤다.
그러나 윤 전 대통령은 그마저도 없었다. 이날 관저를 떠나면서 내놓은 그의 ‘퇴거 메시지’엔 승복이나 사과 대신 ‘감사’만 있었다.
윤 전 대통령은 먼저 “그동안 정말 감사했다”면서 “지난 2년 반, 이곳 한남동 관저에서 세계 각국의 여러 정상들을 만났다. 우리 국익과 안보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던 순간순간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고 말했다.
이어 “지난 겨울에는 많은 국민들, 그리고 청년들께서 자유와 주권을 수호하겠다는 일념으로 밤낮없이 한남동 관저 앞을 지켜주셨다”며 “추운 날씨까지 녹였던 그 뜨거운 열의를 지금도 가슴 깊이 새기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는 “이제 저는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으로 돌아가, 나라와 국민을 위한 새로운 길을 찾겠다”면서 “국민 여러분과 제가 함께 꿈꾸었던 자유와 번영의 대한민국을 위해, 미력하나마 노력을 아끼지 않겠다”고 밝혔다.
내란 우두머리 혐의로 기소돼 14일부터 피고인 신분으로 형사재판을 받는 입장으론 전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파면 후에도 계속된 ‘관저 정치’ 의혹의 연장선에서 ‘사저 정치’를 이어가겠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이날 한남동 관저 앞에 모여든 청년 등 지지자들은 ‘YOON AGAIN’을 외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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