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운의 꿈을 안고 태극마크를 선택한 푸른 눈의 전사들이 있었다. 예카테리나 압바꾸모바는 하얼빈 동계아시안게임에서 귀화 9년 만에 한국 바이애슬론 역사상 첫 국제종합대회 금메달을 따냈다. 하지만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 압바꾸모바는 시상대 꼭대기에 선 다음 날에도, 금메달을 목에 걸고 한국으로 개선한 날에도 마냥 웃지 못했다. “소속팀 감독의 지시 때문에 아시안게임에 나오지 못 할 뻔했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함께 러시아를 떠나 ‘한국의 철인’이 된 티모페이 랍신, 알렉산드르 스타로두베츠는 하얼빈 땅을 밟지도 못했다.
이유는 뿌리 깊은 ‘파벌 싸움’이다. 지난해 국가대표 선발 과정에서 대한바이애슬론연맹과 전남체육회가 정면충돌했다. 최종 엔트리 제출 시한이 미뤄지면서 연맹은 기존에 ‘롤러 스키’로 치렀던 선발전 대신, 실제 스키로 다시 선발전을 치르기로 했다. 설상 종목이니 눈에서 선발전을 하는 게 맞다는 이유였다. 전남체육회는 ‘연맹이 이전 선발전을 무효로 하는 게 특정 선수를 선발하려는 게 아니냐’며 곧바로 반발했다. 그래서 귀화 선수들을 포함한 소속팀 선수들에게 ‘선발전 불참’ 지시를 내렸다. 하얼빈 동계아시안게임 불과 석 달 전 일이었다.
푸른 눈의 태극전사들 꿈은 모두 아시안게임 금메달이었다. 압바꾸모바는 감독의 지시를 거부하고 선발전에 출전해 꿈을 이뤘다. 하지만 랍신과 스타로두베츠는 그러지 못했다. 생계 때문이었다. 랍신은 “생계의 90%를 전남체육회의 급여로 이어가고 있다”며 “아시안게임에 출전하고 싶었지만, 감독의 지시를 거부할 수 없었다”고 했다. 금메달이라는 꿈보다 생계를 더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게 선수들의 현실이다. 아시아에서 세계랭킹이 가장 높은 랍신 정도의 선수가 이 정도면, 다른 선수들이 처한 현실은 더 차가울 것이다.
꿈 대신 현실을 선택한 랍신과 스타로두베츠의 결말은 안타깝게도 ‘새드 엔딩’으로 이어지고 있다. 선발전 불참을 이유로 이들은 연맹으로부터 국가대표 자격 정지 2년 조치를 받을 위기에 처했다. 이런 와중에도 선수들은 취재진에게 억울함조차 호소하지 못했다. 월급을 주는 소속팀과 국가대표 선발권을 가진 연맹의 눈치를 보느라 그저 ‘잘 해결되기만을 바란다’고 했다. 연맹에 항의 차원으로 선발전 불참을 지시한 소속팀의 결정, 선발전에 나오지 않았으니 규정대로 징계를 검토한다는 연맹의 결정 과정에서 이들의 의견은 반영되지 않았다. 그저 결과에 대한 통보만 있었을 뿐이다.
소속팀과 연맹 관계자는 ‘언어 소통에 어려움이 있었다’고 토로했다. 별도의 통역을 두기 어려운 예산 사정도 있긴 하지만, 아쉬웠던 점은 선수들의 입장과 상황을 더 살펴보려는 소통의 노력이 보이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연맹과 소속팀의 싸움에 선수들의 등이 터지기 전, 문화체육관광부와 대한체육회, 국회 등 체육계가 나서준 것은 그래도 다행이다. 유승민 대한체육회장의 “선수들이 훈련에만 몰입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싶다”는 취임사가 실현돼 내년 2월 밀라노 동계올림픽에서 선수들의 꿈이 이뤄지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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