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말을 이런 의미로 사용하게 될 줄 몰랐다. 핏대 선 혐오의 말을 쏟아내는 이들과도 더불어 함께 살아가기 위해 ‘톨레랑스’가 필요하다는 생각에 다다랐으니 말이다.
이제는 고인이 된 ‘나는 빠리의 택시 운전사’의 홍세화 작가를 통해 알게 된 톨레랑스. 그에 따르면 톨레랑스의 핵심은 내 생각이 존중받기를 바란다면 다른 사람의 생각과 태도 또한 존중해야 한다는 상호적 관용의 자세다. 또 자신의 생각과 행동만이 옳다는 독선의 논리에서 벗어나야 하고, 정치적 이념이나 종교적 믿음을 남에게 강요해서는 안 된다.
세계화를 향해 뻗어 나가던 1990년대 중반 낭만과 예술의 도시 파리, 자유와 평등의 나라 프랑스라는 이미지와 함께 소개된 ‘톨레랑스’는 우리 사회가 한 단계 더 높은 문화적 소양을 갖춘 나라로 성장하기 위해 요구되는 필요조건처럼 여겨졌다. 이후 톨레랑스는 ‘다르다는 틀리다가 아니다’란 말과 변주하며 내 삶의 지침서 같은 역할을 해왔다.
익숙해져 새삼스러울 것 없던 이 말을 다시 떠올린 것은 ‘출퇴근 길에 아스팔트 극우의 외침을 듣지 않는 것만으로도 부럽다’고 푸념하던 후배와의 대화 때문이었다. 괴물처럼 여겨지는 그들에 대해서도 톨레랑스가 유효한가? 나는 그들을 포용할 수 있는가, 그들과 친구가 될 수 있는가, 그들과 차 한 잔 나눌 수 있는가?
이상한 것은 톨레랑스를 난민이나 이주자, 성소수자처럼 사회적 약자에 대한 태도로 취했을 때는 별다른 동요가 일지 않던 마음이 거친 증오와 혐오를 쏟아내는 이들에 대한 태도라는 생각에 다다르자 거리끼는 마음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가 정치적 내전을 겪고 있다는 말이 거짓 과장은 아니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마음이 복잡해졌지만 한계치를 넘어서는 거칠고 날카로운 언어를 쏟아내는 이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게 맞다(최소한 그럴 수밖에 없다)는 고민 앞에서 결국 톨레랑스가 해결책이었다. 12·3 계엄 사태로 찢긴 우리 사회가 다시 새출발의 신발 끈을 묶기 위해서는 진영으로 극단화돼 퍼붓는 비난과 증오의 화살을 멈추고 서로를 향해 조금이라도 열린 관용과 포용의 자세가 필요하다는 타협책이었다. 물론 12·3 계엄 사태는 어물쩍 넘어가서는 안 될 일이며 제대로 된 역사적 평가와 단죄가 필요한 사안이다. 그러나 도저히 함께 할 수 없을 것 같은 이들을 향한 톨레랑스도 동시에 작동해야 하는 문제다. 그것만이 찢긴 공동체를 당장 치유할 수는 없겠지만 최소한 상처를 덧나게 만들지 않을 최소한의 방책이기 때문이다.
물론 게임의 룰이 필요하다. 다시 말해, 톨레랑스는 누구를 대상으로 어디까지 용인하는 것이 우리 모두를 위해 더 좋은 것인지 공통된 감각이 전제돼야 한다. 열심히 설득하고 토론하는 노력을 거듭하다 끝내 벽에 부딪히면 ‘다름’이라는 이름으로 포용해야 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작동하는 과정에 대한 공통의 규칙이 전제돼야 한다는 것이다.
우선 톨레랑스는 자신과 정치적 견해가 다르다 하여 상대를 미워하거나 앙심을 품어서는 안 된다. 용기가 수반될 정도로 쉽지 않은 일이지만 그래야 한다. 또 설득의 과정에서 표현의 자유를 인정하되, 혐오나 증오의 언어를 사용해서는 안 된다. 무엇보다 법적 테두리를 벗어나는 폭력에 대해서는 단호히 거부해야 한다. 모든 것은 법 테두리 안에서 이뤄져야 한다.
이 대목에서 정치인과 언론의 책임 있는 자세가 중요해진다. 극단의 언어를 공적 테이블에 옮기는 정치인의 발언과 이를 유통함으로써 터무니없는 메시지에 공신력을 부여해 주는 언론의 행태가 사라지지 않는 한, 톨레랑스가 설 자리는 없기 때문이다.
정보와 메시지 유통에서 소셜 생태계가 중요해지면서 확인된 메커니즘 중 하나는 가짜뉴스, 오정보와 같은 극단의 메시지가 정치인을 비롯한 유명인의 언급을 통해 공적 테이블에 오르고, 이들이 언급했다는 것만으로 뉴스 가치가 있는 것으로 판단한 미디어의 따옴표 저널리즘에 의해 확대 재생산된다는 사실이다. 공론의 공간이 피폐해지는 과정에 정치인과 미디어의 책임이 매우 막중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분석 결과다.
하여 다시 강조한다. 정치인과 미디어는 자신들의 말이 얼마나 무거워야 하는지 생각하고 또 생각해야 한다. 모두를 위한 화합이 아니라 정파적 이익을 위해 대중을 이용하는 정치인과 미디어에 관해 우리 사회가 남겨둔 톨레랑스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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