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의 탄핵심판 선고가 다가오고 있지만 탄핵이 결정돼도 국론은 여전히 분열될 조짐이다. 선고 결과에 승복하지 않으려는 기저에는 12·3 비상계엄을 정당화하는 부정선거 음모론이 있다. 중국의 선거 개입으로 국회 권력이 찬탈당했다는 부정선거론은 윤 대통령이 확산을 방조하거나 조장하고 있는 한 사그라들기 어려워 보인다.
언론은 부정선거론을 무시해 왔다. 터무니없는 음모론에 제도권 언론이 힘을 실어주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사이 음모론은 온라인에서 급격히 퍼졌고 언론이 진실을 감춘다는 불만도 커졌다. 검색 빈도를 분석하는 ‘구글 트렌드’를 통해 보면 ‘부정선거’ 유튜브 검색은 계엄 선포 이전 1년 동안 0에 수렴했다가 지난해 12월 최고치인 100을 찍었고 지금도 90대를 유지하고 있다.
윤 대통령 측 차기환 변호사는 “부정선거를 언론에서 취재해서 보도해 줬으면 사태가 이렇게는 안 됐을 것”이라며 비상계엄을 언론 탓으로 돌리기도 했다. YTN에서는 지난해 12월16일 김백 사장이 부정선거의 시비를 가리는 특집 제작을 주문했지만 “누가 지구를 평평하다고 주장하면 팩트체크에 나서야 하느냐”며 노조가 반발해 없던 일이 되기도 했다.
반면 부정선거 음모론을 뿌리부터 파헤친 언론사들도 있다. 가장 먼저 부정선거론을 정면으로 비판한 건 한국일보다. 한국일보는 1월25일 <개표 조작, 사전투표 조작 모두 음모일 뿐…부정선거 주장 뜯어봤더니>를 보도해 전자개표기 조작을 비롯해 6가지 쟁점을 조목조목 반박했다. 포털 기사에 댓글이 1400개 달리며 큰 호응을 얻었다.
한국일보 보도에도 음모론자들은 ‘빳빳한 투표지’를 해명하지 못했다고 반발했다. 부정선거론의 스모킹건으로 취급받는 빳빳한 투표지는 대표적인 음모론자인 황교안 전 국무총리가 가장 강조하는 근거다. 선관위도 이에 대해 제대로 된 설명을 내놓지 못했다. 투표지를 현미경으로 관찰하면 미세하게 접힌 흔적이 발견되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은 투표지도 많았기 때문이다.
이후 KBS ‘추적60분’은 2월21일 방송에서 모의 투표장을 마련해 선거 시연을 통해 빳빳한 투표지를 반박했다. 사전선거 투표용지는 큼직한 회송용 봉투에 담아 선거구로 보내는데 비례대표가 아닌 지역구 투표용지는 길이가 짧아 접을 필요가 없었다. 추적60분은 옆면이 조금 잘려 나가 부정선거가 의심된다는 투표지도 봉투 개봉기를 사용해 똑같이 만들어 보였다.
이달 4일 방송된 MBC ‘PD수첩’은 더 나아갔다. 강원도 양양에서 진행된 군수 주민소환 투표 현장을 찾았다. 투표지를 반듯하게 접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체로 살짝 말아서 기표함에 넣었다. 주민들은 개표가 쉽게 배려했다거나 도장이 번지면 무효표가 되니 접지 못했다고 말했다. PD수첩은 선거범죄를 조직적으로 시도하는 상황을 인공지능(AI) 그래픽으로 만들어 부정선거가 왜 원천적으로 불가능한지 보여주기도 했다.
부정선거의 허구성은 이렇듯 의외로 쉽게 확인된다. 수원 선관위 연수원에서 중국 간첩 99명이 체포됐다는 음모론도 허구다. 계엄 선포 이튿날 새벽 연수원 근처 농업박물관 주차장 CCTV 영상의 중간 부분이 삭제된 채 공개됐다는 음모론이 있다. 계엄군이 주차장에 도착했다가 떠나는 영상 사이에 체포된 간첩을 버스에 태우는 장면이 있다는 것이다.
기자협회보가 서삼석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에서 1시간 길이 CCTV 영상 전체를 받아 살펴보니 계엄군은 내내 버스 안에 머물며 몇몇이 공중화장실만 다녀올 뿐 누군가를 버스에 태우지 않았다. 언론사들도 전체 영상을 제공받았는데 계엄군이 아무런 활동을 하지 않는 장면을 굳이 보도할 필요가 없었을 뿐이었다.
그동안 언론이 부정선거론을 선뜻 손대지 못한 건 근거가 파편화돼 있고 주장의 갈래가 너무 많다는 이유도 있다. 앞서 나온 언론들이 채택한 방법은 일단 음모론자들의 주장을 인내심 있게 경청하는 방식이었다. 한겨레21은 극우 채팅방 다섯 곳에서 두 달 동안 부정선거 관련 602개 문장을 수집하고 네 가지 유형으로 나눠 8일 <‘중국 혐오’의 진짜 얼굴… 허위·날조>를 보도하기도 했다.
PD수첩은 탄핵 반대집회를 돌며 수집한 어지러운 주장을 사전선거 문제로 귀결했다. 실제 부정선거론자들은 국민의힘 득표율이 높은 본투표는 신뢰하고 본투표를 독려하기도 했다. 사전선거는 투표자 수를 예측해 둘 수 없어 투표지를 즉석에서 인쇄해야 하는 탓에 실수가 잦고, 진보 성향에 젊은 투표자가 선호하다 보니 야당 득표율이 높은데도 부정선거라는 결론으로 이어진 것이었다.
조윤미 MBC PD는 “거꾸로 생각해 보면 사전투표와 합한 전체 득표에선 민주당이 더 많이 가져갔는데 본투표에서는 국민의힘 득표가 높으니 오히려 본투표가 조작됐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며 “결국 부정선거론은 대통령의 권위에 기댄 흠집내기용 의혹제기”라고 말했다. 조 PD는 “수면 아래 있던 음모론이 너무 커졌고 믿지 않던 사람들까지 영향을 받고 있어 혼란스러워하는 중도층을 위해 방송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강형철 숙명여대 교수는 “평소라면 지구 평평설을 언론이 다루면 안 되지만 윤 대통령의 불법 계엄 이유가 바로 그 음모론”이라며 “‘뭐가 있긴 한가 보다’ 할 수 있는 중도층을 위해 사실을 밝혀줘야 한다”고 말했다. 계엄 이후 MBC와 YTN, 시사IN이 한 달 간격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국민 3분의 1이 부정선거를 믿는다는 게 반복해 확인되기도 했다.
강 교수는 언론이 음모론에 응수할지 말지보다 이를 어떻게 다루는지 ‘방법’이 더 중요하다고 지적한다. 그는 “토론식, 논박하는 식이 아니라 꼼꼼히 사실을 짚어주되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지 원인과 문제 지적을 반드시 수반해야 한다”고 말했다. 음모론을 일탈로 전제하고 비판할 목적을 분명히 해야 단순한 논쟁거리로 만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추적60분도 선거 불복의 해악을 설명하는 데 이번 방송의 상당 부분을 할애했다. 특히 김근식 전 국민의힘 비전전략실장을 인터뷰해 메시지를 전했다. 그는 “부정선거에 빠지면 잘못을 인정할 필요가 없어진다”며 낙선에도 반성 없는 정치를 만든다고 짚었다. 여타 음모론과 달리 민주주의 자체를 흔드는 부정선거론을 언론이 이해하고 진지하게 대응할 필요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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