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HD 3부작 다큐멘터리 ‘바실라’로 한국기자상을 받은 설태주 울산MBC 기자는 2월21일 시상식에 오지 못했다. 25년 근속 휴가를 3년 전에 받았는데, 미루고 미루다 그제야 떠난 까닭이었다. 대리 수상한 서하경 보도국장은 그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얼굴이 흙빛이 되고 입술이 부르틀 정도로 일했다….”
지난해 12월에 방송한 ‘바실라’ 제작에 4년이 걸렸다. 중간에 또 다른 다큐멘터리 ‘다섯 개의 다이아몬드’(2022년 8월), ‘눈카마스 코리아’(2023년 12월)도 연출했다. 그는 다큐멘터리 전담 기자가 아니다. 탐사보도부장, 보도국장, 보도제작부 기자로 일하면서 덤으로 했다. 그러려면 남들보다 2~3배 부지런해야 한다. 일과가 끝나면 남아서 취재하고, 휴가도 다 쓰지 않고.
12일 울산MBC에서 만난 설 기자는 “일이 몰릴 때는 입에서 단내가 날 정도지만 즐겁게 취재하고 있다”고 말했다. “왜 그렇게 열심히 하느냐고 묻는다면 짧은 인생에 무엇하나 족적을 남기는 것, 그것이 멋지고 후회 없는 인생이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어요.”
설 기자는 대학 시절을 제외하고 평생을 울산에서 살고 있다. 지역방송 기자로서 그의 취재 영역은 지역의 모든 것이다. 지역에 있으면서 잘 알려지지 않은 가치를 찾고, 알려진 얘기라도 다른 시각으로 접근해 새롭게 보려고 애쓴다. 반구대 암각화로 다큐를 제작한다고 했을 때 다들 그랬다. 많이 있는데 또 하냐?
“또 하냐?”는 수군거림에 다르게 접근
7000년 전 선사시대인이 남긴 바위 그림엔 귀신고래, 혹등고래 등 다양한 종의 고래들, 작살로 고래를 사냥하는 모습, 고래를 해체하는 모습 등이 담겨 있다. 이런 내용을 알린 다큐는 국내에서 나오고 또 나왔다. 그는 다르게 보기로 했다. 암각화 속 고래를 잡는 장면이었다.
고래잡이 그림에 주목해 2년간 17만km를 이동했다. 태평양을 중심으로 남·북반구 대륙 고래 이동 경로를 따라 10개 나라에 분포하는 고래 암각화 유적과 고래잡이 문화를 추적했다. 그 결과물이 2018년 4월에 3부작으로 방송된 다큐멘터리 ‘고래’다. 이 작품으로 제52회 휴스턴국제영화제 자연과 야생 부문 특별심사위원상 등 국내외에서 5차례 수상했다.
“폭우로 반구대 암각화가 물 속에 잠겨 훼손되고 있다는 등의 뉴스를 지난 10년간 앵무새처럼 해왔어요. 부끄럽게도 뭐가 중요한지 몰랐습니다. 중요하니까 보전해야 한다고만 했죠. 지금까지 보도되지 않았던 반구대 암각화에 새겨진 고래잡이 그림을 소재로 이야기를 풀어냈습니다.”
2부작 다큐멘터리 ‘다섯 개의 다이아몬드’도 암각화가 주제다. 반구대 암각화에서 약 1.4km 떨어진 천전리 암각화에 새겨진 문양의 비밀을 찾는 내용이다. 반구대 암각화보다 1년 전인 1970년 발견된 천전리 암각화에는 다이아몬드와 동심원, 물결, 동물 등 다양한 문양이 새겨져 있다. 기하학적 무늬라고 하는데 각각의 문양에 대한 설명은 부족했다.
그는 문양의 비밀을 풀어 천전리 암각화의 새로운 안내서를 쓰고 싶었다. 더구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하면서 암각화 문양의 의미를 설명하지 못한다면 난센스라고 생각했다. 암각화 관련 국내 출판물을 모두 읽는 것에서 시작해 외국 자료를 조사하며 천전리와 비슷한 문양의 암각화를 뒤졌다.
그렇게 탄자니아와 아일랜드, 콜롬비아, 러시아 등 8개국을 찾아 암각화를 확인하고 20여명의 암각화 전문가를 인터뷰해 문양의 의미를 추적했다. 섭외도 쉽지 않지만, 암각화를 찾는 여정은 고생길이었다. 키르기스스탄 사이마르타쉬산 정상에 있는 암각화를 촬영하기 위해 꼬박 하루 산을 오르고, 해발 2000m 지점에서 고산병이 오기도 했다. 러시아 하바롭스크 아무르 강가에선 영하 30도의 혹한에 발이 푹푹 빠지는 눈길을 헤쳐야 했다. 콜롬비아 열대우림의 무더위에 체력적인 한계를 느끼기도 했다.
지역방송사에서 감당하기 힘든 글로벌 프로젝트인데 제작비는 어떻게 충당할까. “외부 지원금을 따와 프로그램을 제작합니다. 제작지원을 해주는 곳이 많거든요. 한국전파진흥협회, 한국언론진흥재단, 지방자치단체 등에 기획안을 제안해서 예산을 마련하죠. 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면 언제나 길이 보입니다. 물론 프로그램 기획안이 좋아야죠.”
설 기자가 프로그램을 기획할 때 끊임없이 고민하는 이유다. 우리 사회에 필요한 보도인지, 해외 사례 등 우리가 참고할 만한 대안은 무엇인지 등을 빼곡히 적은 기획안을 만들어 공모 사업에 지원한다. 떨어질 때도 있다. 그러면 내용을 보강하거나 다른 방향으로 접근한 기획안을 다시 제안한다. 정부 기관을 무작정 찾아가고, 국회의원들 만나 예산 지원을 설득하고….
그가 지금까지 제작한 다큐멘터리는 몇십 편이다. 현대자동차에 관한 다큐멘터리로 입문해 국내 수족관 돌고래의 문제를 다룬 ‘꽃분이의 눈물’(2016년), 불법포획으로 멸종위기에 처한 한국의 밍크고래 실태를 방송한 ‘밍크고래의 춤’(2017년)으로 이어졌다. “기자로 일하면서 ‘세상에 이런 일이 다 있어’라고 분개한 경험을 다큐멘터리 형식을 빌려 탐사보도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경영직군으로 입사해 기자로 전직
설태주 기자는 1997년 1월 울산MBC에 경영직군으로 입사했다. 서울대 지리교육과를 졸업한 그는 장남이라 부모님이 계신 고향에서 일하고 싶었고, 방송국 월급이 많다고 들어 울산MBC에 지원했다. “보통 인문계를 졸업하면 사무직을 많이 가잖아요. 단순히 그렇게 생각하고 입사했는데, 해보니까 잘 안 맞는 것 같더라고요(웃음).”
기획업무를 2년 정도 하다가 광고부로 옮겨 광고사업을 담당하면서 색다른 경험도 했다. 당시만 해도 광고부에서 행사 예고를 짤막하게 30~40초로 만들어 내보내는 스폿광고를 제작했는데 그가 도맡았다. 광고영업을 하면서 남는 시간에 편집 프로그램을 배워서 스폿광고를 만들었는데 꽤 끌렸고, 무엇보다 내가 만든 창작물을 누군가 본다는 게 신기했다. 그런 스폿광고를 몇백 편 만들었다.
그는 2005년쯤 회사 내부 절차에 따라 기자로 전직했다. 재정 형편이 여의치 않아 신규 충원보다는 내부 전환을 통해 보도국 인력을 채우던 시기였다. 경찰서를 시작으로 구청, 상공회의소, 시청 등을 출입하며 데일리 뉴스를 다루고, 보도제작부로 옮겨 주간물이나 특집을 만들면서 기자 경험을 쌓아 나갔다.
울산MBC가 2013년 10월 탐사기획 프로그램 ‘돌직구 40’을 시작하면서 그의 기자 생활은 달라졌다. 첫 방송(투기로 얼룩진 산업단지)을 그가 했다. 울산시가 조성한 일반산업단지 땅값이 처음 분양 때보다 3배가량 오르고 싼값에 받은 땅을 되팔아 시세차익을 얻는다는 내용이었다. 그전까지 우호적인 보도만 하다가 본격 고발 프로그램이 나가니 “울산시가 좀 난리가 났다.”
그는 기자 1명, PD 2명과 함께 돌직구 제작에 참여했다. 탐사보도부장을 맡아 프로그램 전반을 관리하며 4주에 한 번꼴로 돌직구를 제작했다. 아이템 기획에서 취재, 스튜디오 출연은 물론 오디오 더빙, 화면 편집도 스스로 했다. 광고부에 있을 때 스폿광고를 직접 만든 과정은 편집에 큰 도움이 됐다. 편집까지 하다 보니 VJ와 함께 현장에 나가면 어떻게 찍어야 할지, 그런 것도 눈에 보였다. 이런 경험은 다큐멘터리 연출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2013년부터 8년간 돌직구를 제작하며 탐사보도 역량을 키워 나갔지만 어려움도 많았다. 위험하거나 환영받지 못한 장소에 가야 했고, 지역 비리 고발과 권력 감시 보도를 하다 보니 다들 피하고 꺼렸다. 그게 쌓이면서 스트레스가 밀려오고 업무량이 많을 때는 도망이라도 가고 싶었다. 그래도 돌직구를 울산MBC의 대표 프로그램으로 인정해주는 시청자들이 있어 버텼다.
주어진 일 하면서 다큐멘터리는 덤으로
그는 탐사보도부장, 보도국장을 하면서 틈틈이 다큐멘터리를 제작했다. ‘꽃분이의 눈물’, ‘밍크고래의 춤’, ‘고래’는 탐사보도부장으로 있을 때, ‘다섯 개의 다이아몬드’, ‘눈카마스 코리아’, ‘바실라’는 보도국장을 하면서 제작했다. “저는 기본적으로 정규 프로그램을 하면서 2~3개의 특집을 한꺼번에 진행합니다. 정규물을 빨리 준비해두고 시간을 절약해 그 계절에만 할 수 있는 해외취재를 다녀오거나 국내 촬영을 하는 식이죠.”
그는 보도국장으로 4년(2020년 9월~2024년 6월) 일했다. 동료들에게 “보도를 ‘하는 것’보다 ‘잘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당부하며 울산MBC만의 차별화에 역점을 뒀다. 취재기자가 화제의 현장을 직접 취재한 기획 보도 ‘알리고’를 시도하고, 예비타당성 조사 문제 를 연속보도하며 국회 공청회까지 열었다. 공해, 외국인 이주민 등 주제로 언론진흥재단 지원금을 따와 후배들과 제작 노하우를 공유했다. 전국 최초로 시민기자 제도를 육성하고 운영한 것도 보도국장으로 있을 때다.
국장에서 물러난 지금은 보도제작부 소속으로 ‘체인지UP’을 만들고 있다. 그러면서 파도가 잔잔한 날에는 바다로 나간다. 또 다른 다큐멘터리 제작의 일환이다. 제주도 환경단체와 협업해 동해안에서 발견된 밍크고래, 향고래, 참고래의 이동 경로를 추적하고 있다. 고래가 동해안에 어떻게 오가는지 정확한 궤적을 찾는 일이다. 해외에선 일찌감치 고래의 등에 위치추적장치(GPS)를 부착해 고래의 위치와 이동 경로를 살피고 있는데, 국내에선 관련 연구가 전무하다.
국책연구기관도 하지 않은 일을 그가 해보겠다고 나섰다. 외국에서 장비를 임차해 들여왔고 지자체 허가도 받았다. 작년 9월부터 석 달 동안 날씨 좋은 날을 골라 당일치기로 삼척에서 시작해 울진, 울산, 포항 앞바다를 지그재그로 다녔다. 바다에서 고래를 서너 번 발견했지만, GPS 부착엔 실패했다. 그가 찾아간 전문가는 한국에서 불가능하다며 이렇게 말했다. “고래를 발견하기도 어렵고, 쫓아가기도 어렵고, 고래의 등에 GPS를 꽂는 것도 어렵다.” 그는 반문했다. “시도는 해보셨어요?”
그는 앞으로 몇 달간 고래를 찾아 바다를 떠돌 참이다. 고래를 보니까 자꾸 나가면 가능할 것 같더라고 했다. “수족관 돌고래부터 시작해 고래에 대해 알면 알수록 궁금한 것들이 생기는 거예요. ‘우리나라에서 고래가 늘고 있는지’, ‘고래가 동해안을 지나가는지 아니면 동해안에서 살고 있는지’ 물어도 답이 없으니까 자꾸 궁금한 게 쌓이는 거예요. 그래서 차라리 내가 한번 알아보자.”
“지역 특화 아이템 끊임없이 알려야”
그렇다고 해도 ‘또 고래냐?’고 물었다. “어느 한 분야에서 업적을 쌓으려면 평생을 바쳐도 모자랍니다. 고래에 대한 다양한 스펙트럼을 만드는 건 울산MBC만 할 수 있고,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고래나 암각화를 소재로 지금까지 보도하지 않았던 영역을 확장하면 새로운 대작이 될 수도 있습니다. 지역방송이 살아남으려면 지역에 특화된 아이템들을 끊임없이 알려야 합니다.”
그는 지금까지 고래, 암각화, 환경, 비리고발 보도 등을 통해 방송 유공 국무총리 표창, 한국방송대상, 한국기자상, 한국방송기자대상, 휴스턴국제영화제 특별심사위원장상 등 국내외에서 50차례 가까이 수상했다. 특히 지역방송 기자 최초로 한국기자협회 이달의 기자상을 11번 수상하는 기록을 세웠는데, 탐사보도 ‘돌직구’를 하면서 6번을 받았다.
산업현장의 비정규직 산재사망사고 실태를 심층 보도한 ‘죽지 않고 일하고 싶어요’(2016년 8월), 국가보조금을 타내려 마을 전체가 해녀로 둔갑한 실태를 추적한 ‘가짜해녀 어업보상금 사기 보도’(2018년 10월), 일제 문화재 정책과 지자체의 무분별한 식민지 관광산업을 고발한 ‘고적(古蹟)과 식민지 관광’(2020년 8월) 등이다.
어떻게 하면 이런 성과로 이어질까. 그는 창의력과 추진력, 겸손을 꼽았다. “하던 것만 계속하는 틀에서 벗어나 오감을 열어 ‘왜’라는 질문을 던지고, 난관이 있더라도 현장 확인과 분석을 통해 끝까지 취재하겠다는 추진력, 상 좀 받았다고 잘난 척하지 않고 취재원과 주변 동료들에 대한 겸손한 마음가짐. 세 가지 덕목이 있으면 기자로서 선한 영향을 끼치며 보람을 찾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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