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가 언론과 민주주의를 망가뜨려선 안된다

[우리의 주장] 편집위원회

서울외신기자클럽이 지난달 회원들에게 하늘색 보도 완장을 배포했다. 국내에서 활동 중인 특파원들이 시위 현장을 취재할 때 위협당하는 사례가 늘면서 취재진 신분을 분명하게 나타낼 필요성이 생겼다는 게 외신기자클럽의 설명이다. 특히 중국인 혹은 중국 매체 소속 기자가 아닌지 의심하며 시비를 걸거나 국적 증명을 강압적으로 요구받는다고 한다. 이런 일은 윤석열 대통령이 국내 간첩 및 부정선거 행위의 배후로 중국을 지목하고, 윤 대통령의 열성 지지자와 일부 정치인이 중국을 향한 분노를 선동하면서 부쩍 잦아졌다.

세계 각국 주한 기자들의 단체인 서울외신기자클럽이 회원들의 뜻을 반영해 지난 2월 제작, 배포한 완장. 300개가량이 제작돼 현재 대다수가 배포된 상태다.


현장 기자들의 목소리를 들어보면, 보도 완장 정도로는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는 생각이 팽배하다. 아니, 오히려 완장 등으로 기자 신분을 밝힐 게 아니라 감추는 게 더 낫다고들 한다. 마치 몸수색하듯 패용한 사원증을 들춰가며 취재진에 적개심을 보이는 시위대를 수시로 마주하기 때문이다. 국제기자연맹(IFJ) 등 국제언론단체의 지침 또한 위급할 때는 신분을 숨기라고 조언한다. 심지어 시위 현장에서 많이 쓰이는 태극기나 성조기를 소지하고 다닌다는 기자들이 적지 않다. 아무런 보호도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그나마 쥐어짠 자구책이 혹시 취재 윤리에 어긋나지는 않는지 고민하기까지 한다. 이는 분명히 정상적인 취재 환경이라고 할 수 없다.


윤 대통령 탄핵 심판 선고가 임박하면서 취재 현장의 불안감은 날로 높아지고 있다. 단순히 불길한 예감이 아니라 이미 목격한 현실이다. 실제 2017년 헌법재판소가 박근혜 당시 대통령 파면을 선고할 때도 탄핵 반대 집회 참가자들이 시위 물품을 던지며 취재진을 폭행한 사건이 있었다. 그때보다 훨씬 더 과열된 양상을 보이는 지금은 말할 것도 없다. 1월19일 새벽에 일어난 서울서부지법 폭동은 우리 사회의 일부가 얼마나 극단으로 경도됐는지를 여실히 보여줬다. 그런 광적인 분노의 1차 표적은 현장에 항상 가까이 있어야 하는 취재진이 될 가능성이 크다.

안전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서부지법 폭동 당시 경찰의 사전 대응이 느슨했다는 지적이 많았다. 이를 반면교사 삼아 경찰은 탄핵 심판 선고 당일 시위 현장에서 폭력을 예비하거나 선동하는 세력이 없는지 면밀히 주시해야 한다. 일부 언론사는 관할 경찰서에 경비를 요청하는 공문을 보내기도 했는데, 당국은 초유의 상황이라는 점을 감안해 진지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 기자 개개인도 위험에 대한 감수성을 높여야 한다. 상황이 급박하면 현장을 사수해야 한다는 책무감은 잠깐 내려놓고, ‘현장을 벗어나도 언제든 돌아올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안전 지침을 우선해야 한다.


우려는 선고 당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이후에도 한참 극심한 갈등이 사회 전반을 뒤덮으리라고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언제나처럼 분노가 언론을 향하도록 선동하는 이들도 나타날 것이다. 민주주의의 보루인 언론은 보호받아야 마땅하지만, 무거운 책임 또한 느껴야 한다. 언론의 사실 전달 기능을 명분으로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극단적 주장의 확성기 노릇을 해서는 안 된다. 작금의 민주주의 위기를 수습하는 데는 언론의 역할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탄핵을 두고 언론사마다 견해 차이가 존재하는 건 사실이지만, 적어도 선고 이후에는 헌법과 민주적 절차에 승복하고 갈등을 극복할 길을 함께 모색해야 한다. 민주주의를 위해 언론을 지켜야 함은 물론이며, 언론 또한 민주주의를 지킬 책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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