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 광주 진실 알린 독일 공영방송, '계몽령' 다큐에 충격

12·3 계엄 배경을 '글로벌 체제 전쟁'으로 조명
부정선거 등 극우논리 그대로…"편향·왜곡" 비판
"한국이 중국·북한 영향 아래? 명예 실추 사과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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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 비상계엄 사태의 배경을 중국과 북한 간첩, 부정선거 등 극우적 관점에서 다룬 다큐멘터리가 독일 공영방송 채널에서 제작, 공개돼 파문이 일고 있다. 45년 전 신군부 계엄에 맞선 광주의 참상과 진실을 세계에 알렸던 방송이 이런 다큐를 제작했다는 점에서 충격이 더 크다.

독일의 공영방송 ARD와 ZDF가 운영하는 전문편성 채널 Poenix가 2월25일 웹사이트에 공개한 <인사이드 코리아-미국, 중국 그리고 북한(Inside Südkorea-USA, China und Nordkorea)> 다큐멘터리.

독일의 공영방송 ARD와 ZDF가 운영하는 전문편성 채널 Poenix는 2월25일 웹사이트에 <인사이드 코리아-미국, 중국 그리고 북한(Inside Südkorea-USA, China und Nordkorea)>란 제목의 약 30분짜리 다큐멘터리를 공개했다. 이 다큐는 12·3 계엄 이후의 한국 상황을 다룬 것인데, 제목이나 “정치적 갈등은 미국, 시진핑, 김정은 간의 글로벌 권력 투쟁을 반영하는 것인가”라는 방송 소개 글에서 볼 수 있듯 계엄 선포를 윤석열 대통령 측과 그를 지지하는 극우 진영에서 주장해 온 ‘글로벌 체제 전쟁’의 맥락에서 다루고 있다.

계엄령 선포 후 “폭동을 막기 위해” 군인을 국회의사당에 파견했다거나 사상자도 없고 언론은 통제되지 않았다는 둥 윤 대통령 측 주장을 그대로 따른 나레이션이 흐르는 것은 물론, 탄핵 반대 집회에 앞장서는 보수 유튜버 우동균씨가 “저널리스트”로 소개되고 황교안 전 국무총리 등과 함께 부정선거가 “수학적으로 증명”된다고 주장해 온 허병기 인하대 공대 명예교수가 주요 인터뷰이로 등장하기도 한다.

이 다큐는 보수·극우 진영을 중심으로 화제를 모으며 한국어 자막을 단 영상이 유튜브 등에 공유됐고, ‘진실의알약’이란 유튜브 채널에 올라온 영상은 25만 넘는 조회수를 기록 중이다.

국민의힘 ‘진짜뉴스 발굴단’에서도 4일 방송 내용을 한국어로 번역해 공유하며 “이번 다큐멘터리는 대한민국의 탄핵 심판 국면을 바라보는 독일의 시각을 보여주며, 대한민국 정치와 국제 정세 속 위치를 재조명하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하기도 했다.

“탄핵 찬성 시민들이 친중·친북인 양 왜곡, 한국인 명예 실추”

해당 다큐를 주요하게 다룬 언론 보도들.

한발 늦게 우려의 목소리가 나왔다. 신진욱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5일 페이스북에 해당 방송을 뒤늦게 봤다며 “이 방송은 한국인의 절반 이상이 윤석열 지지로 돌아섰고, 지금 국회를 구성한 총선은 부정선거 가능성이 높고, 야당과 탄핵 찬성자들이 중국, 북한의 영향 하에 있거나 친중, 친북인 것처럼 왜곡 보도했다”며 비판 글을 썼다.

이어 “ARD와 ZDF는 이처럼 민주주의와 자유, 인권을 파괴하려 한 군사쿠데타를 정당화하고 한국의 국회, 헌법재판소, 선거관리위원회 등 헌법기관들의 신뢰를 실추시키는 보도를 즉각 중단해야 하며, 민주주의를 지키는 한국인들이 중국, 북한 정부의 영향 하에 있는 듯이 보도함으로써 심대하게 명예를 실추시킨 데 대해 사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글을 본 한네스 모슬러 독일 뒤스부르크에센대 교수(한국명 강미노)도 해당 방송이 무엇이, 왜 문제인지 비판하는 글을 페이스북에 적었다. 이를 한국어로 번역해 정리한 슬로우뉴스에 따르면 모슬러 교수는 해당 방송에 대해 △한쪽의 주장을 편향되게 인용하고 △여론조사의 일부를 과장하고 있으며 △ 중국과 북한의 위협이라는 주장을 검증 없이 인용한다는 점 등을 지적했다.

해당 영상은 독일 현지 시각으로 6일 오전 9시30분 TV 본방송이 예정돼 있었는데, 신진욱 교수는 “일단 방송되면 많은 한국인에게 돌이킬 수 없는 손실을 남긴다”며 “이에 대해 한국의 언론단체들은 신속하고 엄중하게 대응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힌츠페터 기자가 알린 한국 민주주의 역사, ARD가 부정 ”

이에 6일 언론단체 등이 잇따라 규탄 성명을 발표했다. 전국언론노동조합, 언론개혁시민연대 등 언론과 표현의 자유 증진을 위해 활동하는 한국의 16개 인권·언론단체의 연대체인 ‘혐오와 검열에 맞서는 표현의 자유 네트워크(약칭 21조넷)’은 이날 성명을 내고 “우리는 한국의 중요한 사태를 보도한 외국 언론사의 뉴스와 다큐멘터리를 많이 보아왔지만 이토록 허위정보에 가까운 콘텐츠는 본 적이 없다”면서 “무엇보다 이 다큐멘터리가 유럽의 대표적인 공영방송인 두 방송사에서 취재, 제작, 편성했다는 사실에 깊은 유감을 표한다”고 밝혔다.

21조넷은 성명에서 “이 다큐멘터리는 3자의 시선을 벗어나 한국 민주주의를 위협하고 있는 극우 세력의 주장을 오래된 냉전 체제의 관점으로 확대하고 왜곡했다”며 “극우 지지자들의 발언, 이들 발언의 근거로 제시하는 신뢰도 낮은 전문가들의 인터뷰, 그리고 이들의 주장을 토대로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를 부풀리는 서사를 반복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전남도청 앞에서 열린 시민 집회를 취재 중인 위르겐 힌츠페터 기자의 모습. 힌츠페터는 5·18 당시 독일 제1공영방송 ARD-NDR의 일본 특파원으로 광주의 상황을 현장에서 취재해 가장 먼저 세계에 알렸다. /5·18기념재단

특히 “이 다큐멘터리의 가장 큰 문제는 유럽이 냉전 시대에 가졌던 동아시아에 대한 선입견을 부활시켰다는 점이다. 다큐멘터리는 현재 한국의 사태를 ‘중국-북한-극좌 야당의 은밀한 정치적 동맹’과 ‘미국-일본-여당’이라는 이분법적 냉전 구도로 바라보고 있다”고 지적하며 “다큐멘터리의 시선으로 본다면 유럽의 시청자들은 한국을 일본 식민지 해방 직후의 부실한 민주주의 후진국으로 여기게 만들 것”이라고 우려했다.

또한 “ARD와 ZDF는 이 다큐멘터리가 현재 한국의 사태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전혀 고려하고 있지 않다”면서 “이 프로그램은 한국 민주주의의 근간을 흔들고 있는 극우 세력의 폭력에 국제사회가 정당성을 부여할 선전 수단으로 쓰일 것이다. 이러한 효과로 독일 역사에서 돌이킬 수 없는 20세기 나치즘이 21세기 한국에서 부활할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단체는 “이 다큐멘터리 제작진뿐 아니라 두 공영방송사의 공식적인 사과를 요구한다”면서 “무엇보다 1980년 ARD 특파원이었던 힌츠페터는 광주민주화 항쟁을 최초로 취재한 외신 기자였다. 그가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전 세계에 알렸던 한국 민주주의 투쟁의 역사를 ARD가 부정하고 있다”고 밝혔다. 21조넷은 이날 성명을 외신기자들에게도 영문으로 배포했다.

92개 시민·사회·노동단체로 결성된 언론장악저지공동행동도 이날 성명을 내고 “이번 다큐멘터리가 객관성을 상실한 채 한국 민주주의를 훼손하는 극우 세력 주장을 일방적으로 확대 재생산한 점을 강력히 규탄”했다.

이어 “ARD와 ZDF는 즉각적인 사과와 함께 다큐멘터리의 문제점을 공식 인정하고 재검토할 것을 촉구”하며 “국제사회가 이 사안을 주목하고 있음을 강조하며, 앞으로 유사한 왜곡 보도가 일어나지 않도록 대응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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