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14일 시작된 윤석열 대통령 탄핵 심판의 변론이 2월25일부로 종결되었다. 놀랍게도 이 변론 기간에 윤석열과 법률 대리인단, 국민의힘, 극우 지지자들이 계엄을 정당화하고 사법 체계와 분쟁 해결 기관으로서 헌법재판소의 입지를 부정하는 온갖 거짓과 음모론의 말 잔치를 벌였다. 더 놀라운 건 이런 말들의 잔치에 많은 언론이 상당히 동조했다는 사실이다.
민주언론시민연합은 49개 언론사를 대상으로 이 기간에 발행된 기사 8187건을 분석해 내놓았다. 키워드 ‘헌법재판소+헌재+윤석열+변론+탄핵심판’으로 검색하여 중복 데이터 및 관련 없는 내용을 제외한 결과였다. 이 기사 중 무려 31.5%에 해당하는 2581건이 윤석열과 대리인단의 말에 따옴표만 붙여 그대로 전하는 ‘받아쓰기’ 기사였다.
이런 ‘받아쓰기’가 일어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철학자 한병철은 <서사의 위기>에서 ‘서사’를 “이야기에 내재해 있는 전승적 지식”이라고 말한다. ‘서사’에는 오랜 시간 쌓인, 세대를 걸쳐 물려줄 수 있는 ‘경험’이 담겨 있다. ‘서사’는 새롭지 않아도 귀 기울여 들을 만할 뿐만 아니라, 오랜 지혜를 함께 귀 기울여 듣는다는 점에서 ‘경청의 공동체’를 만든다.
이와 달리 ‘정보’는 ‘찰나의 순간에 작동한다.’ 정보에는 세대를 물려줄, 새로운 ‘씨앗’으로서의 ‘경험’은 중요하지 않다. 정보는 사람들이 한번 보고 나면 이내 ‘부재중 메시지’가 되고 만다. 그 부재의 자리는 새로운 정보로 끊임없이 대체된다. 더하여 사람들을 그 자리에 묶어두기 위해 새로운 정보는 더 놀랍고 더 자극적이어야 한다. 한병철이 벤야민을 인용하며 지적하듯, 언론은 이런 정보의 속성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특히 디지털 시대의 정보는 더욱 그러하다. 디지털화된 정보는 24시간 실시간으로 공간의 제약 없이 움직인다. 사람들은 저녁 뉴스나 다음 날의 조간신문을 기다릴 필요가 없다. 쉽게 말해, 디지털 시대의 정보는 24시간 내내 ‘부재중 메시지’란 악몽에 시달린다. 더 많은 정보를 아무리 빨리 제공하더라도 그 악몽에서 벗어날 순 없다. 언론의 입장에서 더 신속하게 제공하는 정보는 그 악몽의 순간을 더 빨리 앞당길 뿐이다.
‘받아쓰기’ 기사는 이런 악몽의 순환에 가장 쉽게 적응하는 수단이다. 따옴표만 달고 누군가의 자극적인 말을 계속 옮기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따옴표 안의 말이 사실인지, 의미가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따옴표 안에서 끊임없이 생산되는 단기적 정보의 연속성과 자극적인 힘이다.
이런 경향은 탄핵 심판 보도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자신들이 옮기는 따옴표 안의 말이 선거체계, 사법 체계, 국가 기관 간 분쟁 해결 체계 등과 같은 국가의 근본 시스템에 대한 의심, 회의, 불신을 일으키는지는 우리 언론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듯 보인다.
물론 따옴표 보도를 두고 ‘있는 사실을 가치판단 없이 그대로 옮긴다’라고 주장할 수 있다. 하지만 아쉽게도 우리가 삶을 누리는 정치 세계엔 가치 중립적인 지대가 존재하지 않는다. ‘민주 공화국’이란 말엔 이미 ‘인간 존엄성을 지키는 법이 통치하는 대표자 정치체계’를 더 선호한다는 우리의 가치판단이 들어가 있다.
우리는 그 가치판단을 후세대에 들려줄 만한 ‘민주적 서사’로 만들어 물려준다. 그런 서사 없이 어떤 민주적 체계도 유지되지 않는다. 우리 헌법이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 이념을 계승”한다는, 역사적 사건을 불러들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보통사람들이 부당한 지배를 향해 저항하는 민주적 서사를 정당화하는, 우리 후세대에 들려줄 만한 사건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반민주적인 발언을 따옴표 안에 넣어 그대로 계속 옮기는 일은 때로 그 자체로 반민주적인 가치판단 행위일 수 있다. 민주적 체제를 파괴하려는 자들의 말이 아무런 거름망 없이 이렇게 난무할 수 있는 이유는, 결국 우리 언론에 ‘민주적 서사’의 힘이 미약하거나 부재하기 때문이 아닐까?
엄청난 양의 받아쓰기 보도를 보며 벤야민의 탄식을 떠올린다. “세대로 대물림되는 반지와 같이 견고한 말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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