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신의 곡처럼… 가래 끓는 목소리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다시보는 언론계 역사·인물·사건, J스토리]
① 김지하 옥중수기 '고행… 1974'와 인혁당 재건위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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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들어 유신체제에 대한 반대 물결이 확산하자 박정희는 대통령직을 걸고 유신헌법 찬반을 국민투표에 부친다. 야당과 재야세력, 종교계 등이 국민투표 거부를 선언했으나 박정희는 2월12일 국민투표를 강행해 79.8% 투표율에 73.1% 찬성으로 통과됐다고 발표했다. 전국에 비상계엄령이 내려진 공포 분위기 속에서 유신헌법에 대한 찬반토론은 고사하고 유신체제에 대한 장점만 선전되는 상황에서 나온 결과였다.

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구속된 전창일씨의 아내 임인영씨가 박정희 대통령에게 인혁당 관련자들이 무죄임을 호소하는 글. 1975년 2월3일자 동아일보 광고란에 실렸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오픈아카이브

박정희는 국민투표가 통과되자 자신감을 얻었던지 사흘 뒤 특별담화를 통해 구속된 민주인사와 학생들을 일괄 석방한다고 밝혔다. 이른바 2·15조치였다. ‘인민혁명당(인혁당) 재건위 사건’ 관련자 23명과 유인태, 이현배, 이강철 등을 제외하고 민청학련 사건 관련자 대부분이 2월15~17일 형집행정지로 석방됐다.


김지하는 2월15일 지학순 주교, 박형규 목사, 백기완 백범사상연구소장, 김동길 교수 등 56명과 함께 풀려났다. 1974년 4월 민청학련 사건 주모자로 몰려 도피생활을 하다가 흑산도에서 체포된 김지하는 사형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돼 영등포교도소에 수감 중이었다.


김지하는 “종신형을 받았는데 벌써 나오다니 시간이 미쳤든지, 내가 미쳤든지 둘 중 하나가 미친 것 같다”며 “내가 관련된 소위 민청학련 사건은 순수한 민주구국투쟁이며 정정당당한 합법적인 운동이었다. 정부의 정책을 비판한다고 해서 가혹한 탄압을 할대로 한 뒤 이제 석방한다는 것은 돼먹지 않은 호도책이다. 참으로 끔찍스런 사실들이 낱낱이 공개될 것”이라고 석방 소감을 밝혔다.

◇김지하 찾아온 동아일보 이부영·장윤환 기자
김지하는 출옥 후 처가인 서울 성북구 정릉의 박경리 작가 댁에 머물고 있었다. 그때 동아일보 문화부 기자 이부영과 장윤환이 찾아왔다. 개다리소반을 놓고 소주를 마시다가 이부영이 김지하에게 지난 1년 감옥에서 겪은 일을 써보라고 권했다. 당시를 회고하는 이부영의 말이다.


“우리가 취재하러 갔는데 김지하 시인이 직접 쓰는 게 낫겠다 싶어 부탁했다. 김지하는 즉석에서 이야기하듯 글을 써주었다. 신문에 실린 양손에 수갑 찬 그림도 장윤환 선배가 모델이 돼서 김지하가 직접 그린 그림이다.”


김지하는 1975년 2월25·26·27일자 동아일보에 ‘苦行(고행)…1974’라는 제목으로 세 편의 글을 연재한다. 민청학련 사건과 인혁당 사건이 무고한 사람들을 고문하여 조작한 것임을 세상에 폭로한 글이었다.


2월26일자 글에서 김지하는 “잿빛 하늘 나직이 비 뿌리던 어느 날. 누군가 가래 끓는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더군요…”라며 인혁당 재건위 사건 사형수의 이야기를 전한다.


‘뺑끼통(감방속 화장실을 뜻하는 은어)’으로 들어가 창에 붙어서서 “나를 부르는 사람이 누구냐”고 큰 소리로 묻자 “하재완입니더”라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가 “하재완이 누굽니까?”라고 묻자 “인혁당입니더”라는 목소리가 돌아왔다.


영등포교도소 1사(舍) 위층 15방에 있던 김지하와 1사 아래층 17방에 있던 하재완 사이에 ‘통방(재소자들이 창을 통해 교도관 몰래 대화하는 것)’이 시작됐다. 2월26일자 글에서 김지하와 하재완의 대화를 옮긴 부분이다.



“인혁당 그거 진짜입니까?”
“물론 가짜입니더.”
“그런데 왜 거기 갇혀 계슈?”
“고문 때문이지러.”
“고문을 많이 당했습니까?”
“말 마이소! 창자가 다 빠져나와버리고 부서져버리고 엉망진창입니더.”
“저런 쯧쯧”
“즈그들도 나보고 정치 문제니께로 쬐끔만 참아달라고 합디더.”


1975년 2월25·26·27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김지하 시인의 ‘고행…1974’.

◇귀신의 곡처럼 들린 그 가래 끓는 소리
그 뒤 7월 언젠가, 김지하는 구치소 내 의무과 의사가 실시하는 재소자 진찰을 위해 기다리다가 하재완을 만났다. 그날 하재완은 교도관 눈치를 봐가며 통방 때와 똑같은 내용의 얘기를 낮고 빠른 소리로 김지하에게 전했다.


김지하는 하재완과 그날 만남을 이렇게 썼다. “마치 지옥에서 백년지기를 만난 듯이 내 어깨를 꽉 끌어안고, 그러나 내 귀에는 한이 맺힌 귀곡성(鬼哭聲)처럼 무시무시하게 들리는 그 가래 끓는 숨소리와 함께 열심히 열심히….”


그는 그 무렵 재판을 받으러 법정으로 출두하다 또 다른 인혁당 사형수 이수병을 만났고, 법정에서 민청학련 사건으로 잡혀 들어온 경북대학교 학생 이강철이 “인혁당의 ‘인’자도 들어보지 못했는데, 인혁당을 아는 것으로 시인하지 않는다고 검사 입회하에 전기고문을 수차례 받았다”는 말도 들었다. 김지하는 “소위 인혁당이라는 것이 조작극이며 고문으로 이루어지는 저들의 전가비도의 결과였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했다.


풀려난 민청학련 학생들이 폭로한 고문 사례는 충격적인 뉴스였지만 권력이 장악한 언론엔 거의 보도되지 않았다. 김지하의 글은 인혁당 재건위 사건이 고문에 의해 조작됐음을 세상에 폭로하는 결정타였다. 그는 이 글로 인해 중앙정보부에 다시 끌려가 고문을 받고 반공법 위반 혐의로 재수감된다.


김지하가 감옥에서 만난 하재완과 이수병 등 인혁당 재건위 사건 관련자 8명은 1975년 4월9일 사형이 집행된다. 대법원에서 형이 확정된 지 18시간 만이었다.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부끄럽고 잔인한 사건이었다.


인혁당 재건위원회 사건은 1974년 4월 박정희가 “불순세력의 조종 아래 민청학련이 인민혁명을 획책하고 있다”고 발표하면서 시작됐다. 박정희는 4월3일 밤 10시 긴급조치 4호를 공포했다.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에 가입하거나 관련된 자는 최고 사형에 처하며 학교 내외의 집회, 시위, 농성을 일체 금지한다는 내용이었다.


당국이 발표한 민청학련이라는 단체는 존재하지 않았다. 1974년 4월3일 전국 여러 대학에서 동시에 대규모 반유신 시위를 하자고 합의한 학생운동 진영이 유인물을 제작하면서 신뢰도를 높이기 위해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이란 이름을 붙인 것이었다.


1974년 4월25일 중앙정보부장 신직수는 중간수사결과를 발표하며 “민청학련 지도부에는 공산계 불법단체인 인민혁명당 조직과 재일 조총련의 조종을 받는 일본 공산당, 국내 좌파혁신계가 복합적으로 작용했다”고 밝혔다.


5월27일 비상군법회의 검찰부는 ‘민청학련이 주동이 된 국가변란 기도 사건’에 대한 추가발표를 한다.


“서도원, 도예종 등 대구지역 옛 혁신계 인사들이 인민혁명당을 재건하고, 여정남을 학원 담당으로 하여 대구지역 학생운동을 배후조종하다가 여정남을 서울로 파견해 이철, 유인태를 만나 이들을 조종하여 전국적인 대학생 조직을 만들도록 하였다. 대규모 시위를 통해 군중을 폭도화하여 주요 공공건물을 점거·방화함으로써 정부를 전복하고, 임시 과도정부를 설립하여 궁극적으로 공산주의 정권을 세우려 하였다”는 것이 주요 내용이었다.

1974년 5월27일 비상군법회의 검찰부가 언론에 공개한 민청학련 사건 조직도.


◇대법원 판결 18시간 만의 전격 사형
인혁당 사건은 발생 시기에 따라 1차 인혁당 사건(1964년)과 2차 인혁당 재건위 사건(1974년)으로 나뉜다.
1차 인혁당 사건은 1964년 격렬하게 전개되던 한일회담 반대시위를 잠재우기 위해 중앙정보부가 만들어냈다. 중앙정보부는 1964년 8월14일 “북괴의 지령을 받고 국가변란을 기도한 대규모 지하조직 인민혁명당을 적발했다”고 발표했다. 관련자 47명 중 최종적으로 2명에게 1~3년의 징역형이 선고됐지만, 피의자들을 고문하여 사건을 조작한 진상이 폭로되면서 반국가단체로서 인혁당은 존재하지 않은 것으로 끝난 사건이었다.


인혁당 재건위 사건은 그로부터 꼭 10년 뒤인 1974년 4월 중앙정보부가 민청학련 배후세력으로 ‘인혁당’을 지목한 사건이다. 중앙정보부는 서도원(52·전 대구매일신문 기자), 도예종(51·삼화토건 회장), 하재완(44·양조장 경영), 이수병(37·삼락일어학원 강사), 김용원(40·경기여고 교사), 우홍선(45·한국골든스탬프사 상무), 송상진(47·양봉업), 여정남(30·전 경북대 학생회장) 등 관련자 24명을 검거했다.


여정남은 1964년 한일회담 반대시위를 주도하다 제적된 경력이 있었다. 서도원, 도예종, 송상진, 하재완 등은 4·19 직후 부산·대구지역을 중심으로 활발한 움직임을 보였던 민주민족청년동맹의 중심인물들로 1971년 대선 때 경북민주수호국민협의회를 만들어 김대중 후보를 지원하는 활동을 했다. 이수병은 4·19 이후 경희대 민족통일연맹위원장으로 전국의 대학생들에게 남북학생회담을 제안하는 데 앞장섰다.


인혁당 재건위 사건 관련자들은 혹독한 고문을 당한다.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반복적으로 일삼았고, 장소를 가리지 않고 몽둥이질을 했으며 일주일 이상 잠을 안 재우기도 했다. 김지하가 옥중에서 만난 하재완은 폐농양증에 걸려 입에서 피를 토했고, 장이 항문으로 빠져나와 똑바로 앉거나 걷지 못했다.


비상보통군법회의 1·2심 재판부는 서도원, 도예종, 하재완, 이수병, 김용원, 우홍선, 송상진 등 인혁당 재건위 관계자 7명, 민청학련 관계자 중 인혁당과 연결된 여정남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1975년 4월8일 대법원은 상고를 기각하고 8명에게 사형을 확정했다. 그리고 대법원 확정 판결 18시간 만인 4월9일 새벽 4시30분 서도원을 시작으로 사형이 집행됐다.


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사형당하거나 수감된 이의 가족들은 가혹한 시대를 살아야 했다. 어디를 가든 감시와 사찰이 따라다녔고, 가난에 시달렸다. 경제적 어려움이나 정부의 핍박보다 ‘빨갱이 가족’이라는 주홍글씨에 말로 다할 수 없는 고통을 겪었다. 그저 죽은 듯이 숨소리도 내지 못하고 없는 사람처럼 살아야 했다.


그러나 가만히 있지 않았다. 인혁당 재건위 사건 피해자와 유족들은 진실을 밝히기 위한 길고도 외로운 싸움을 시작했다. 2007년 1월23일 서울중앙지법에서 인혁당 재건위 사건 사형수들에 대한 재심 선고가 있었다. 재판부는 고 도예종을 비롯한 피고인 8명에게 씌워진 긴급조치 위반, 국가보안법 위반, 내란 예비음모, 반공법 위반 혐의의 모든 사안에 대해 전원 무죄를 선고했다.


<참고자료>
▲이건혜, 『박정희는 왜 그들을 죽였을까』, 책으로 보는 세상, 2013
▲허문명, 『김지하와 그의 시대』, 블루엘리펀트, 2013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한국민주화운동사2-유신체제기』, 2009, 돌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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