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시사기획 창' 기자들은 왜 '피 말리는 사흘' 보냈나

방송직전까지 '방송불가' 압박, 사흘 간 수정·삭제 지시
국장·본부장 "'파우치' 빼고 제목에 '혐의 붙이라" 요구
기자들 "편성규약 위반… 이러니 '파우치 방송'이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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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기 비슷한 것 보셨습니까? 시사기획 창 <대통령과 우두머리> 뒤에 붙어있는 두 글자를 누가 그렇게 부르더군요.”

14일 방영된 KBS ‘시사기획 창’ <대통령과 우두머리> 편을 제작한 기자들이 방송 이틀이 지난 16일 ‘이러니 ‘파우치 방송’이라고 하는 겁니다’ 제하의 성명을 냈다. 이들은 “이 성명은 ‘대통령과 우두머리’ 제목 옆에 ‘모기’ ‘코딱지’ 비슷한 글자가 붙게 된 과정에 대한 이야기”라고 했다.

15일 언론노조 KBS본부 성명에서 발췌한 '시사기획 창' <대통령과 우두머리> 제목 수정 전, 수정 후 사진. 이재환 보도시사본부장의 지시로 시사기획 창 기자들은 제목 뒤에 '혐의' 자를 붙여야 했다. /언론노조 KBS본부 제공

기자들이 말하는 “모기와 같은 두 글자”는 바로 ‘혐의’다. 기자들은 성명을 통해 해당 방송이 나가기 전인 사흘 간 이재환 보도시사본부장, 김철우 시사제작국장의 ‘방송 불가’ 압박에 일부 내용이 수정·삭제된 일, 방영 당일 직전까지도 이뤄진 부당한 지시,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로그램을 내보낼 수 있었던 그 혼돈의 과정을 상세히 전했다.

김지선·서영민·하누리 기자가 취재·제작한 ‘시사기획 창’ <대통령과 우두머리> 편은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 가결 한 달을 맞아 이 사태가 어디에서 시작됐는지 살펴보는 내용이다. 윤 대통령이 어떻게 내란 우두머리 혐의를 받는 피의자가 됐는지에 대한 과정과 비상계엄 선포 이유로 든 부정 선거 주장에 대해 근거가 있는 건지, 대통령이 왜 극우 유튜버들이 주장하는 음모론에 빠지게 됐는지 등을 기록했다.

‘이 과정에서 언론은 제 역할을 했는지’에 대한 부분에선 박장범 KBS 사장이 ‘뉴스9’ 앵커를 맡고 있던 지난해 2월 진행한 윤 대통령과의 대담 장면이 등장했다. 하지만 당시 박 사장이 김건희 여사의 명품가방 수수 의혹에 대해 질문하며 디올 명품 백을 ‘파우치’, ‘외국 회사의 조그만 백’으로 지칭해 논란이 된 발언은 등장하지 않았다. “‘파우치’ 부분을 아예 삭제하라. 따르지 않으면 방송 불가”라는 이재환 본부장의 지시가 있었기 때문이다.

해당 내용 이외에도 방영 당일까지도 제목에 ‘혐의’자 추가, ‘체포 거부하는 대통령’ 부분 내레이션 삭제 등 여러 지시가 내려졌다. 이들 기자들은 “사흘 내내 제작진의 피를 말리며, 하나를 수용하면 다시 하나를, 또 다른 하나를 요구했고, ‘이 상태로는 방송이 힘들다’는 후렴구를 반복하며 요구, 또 요구를 반복하는 고개 넘기가 계속됐다”고 토로했다.

성명에 따르면 프로그램 내용 수정을 먼저 요구한 건 김철우 국장이다. 그는 팀장, 부장 데스킹을 거친 원고에 대해 추가 수정을 요구했고, 기자들은 ‘일단 불방은 막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수용할 수 있는 건 반영했다. 하지만 김 국장은 추가로 박장범 사장이 했던 ‘이른바 파우치, 외국 회사 조그마한 백’ 질문과 윤 대통령 답변, 대담의 여파를 데이터로 분석한 내용을 아예 삭제하라고 지시했고, 제작진은 대담 분량을 절반 정도로 줄이는 것으로 잠정 합의안을 제시해 제작을 마무리하려 했다. 그러나 이후 이재환 본부장이 대담에서 '파우치' 부분을 아예 삭제하라고 했다. 그뿐만 아니라 “제작진과는 한 번의 상의도 없이” 원고 구석구석에 대해 수정과 삭제를 지시했다. 방송을 네 시간쯤 앞둔 시점 제목에 혐의 글자를 달아야 한다고, ‘야당 때문에 일을 못 해 힘들다’는 대통령의 녹취도 더 넣으라 요구한 것도 이재환 본부장이었다.

14일 방영된 KBS ‘시사기획 창’ <대통령과 우두머리> 편에 등장한 박장범 당시 뉴스9 앵커가 진행한 윤석열 대통령과의 대담 장면. 박장범 사장이 대담에서 질문한 '파우치' 부분 발언은 이재환 본부장의 지시로 결국 삭제됐다.

세 기자는 “대단한 사흘이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방송이 나갔으니 그냥 덮고 지나가면 되는 일이냐”고, “왜 프로그램 제작 과정에서 꼭 필요한 논리 전개의 한 부분을 논리적 설명도, 정당한 절차도 지키지 않으면서 빼야 한다고만 강요한 것이냐”고 보도본부에 물었다.

“보도시사본부장의 불방 지시는 사실이 아니고, 합리적 의견 조정을 이끌어내는 과정에서 양측의 건설적 갈등은 불가피한 측면이 있었다”는 전날(15일) 나온 회사의 입장에 대해서도 기자들은 정면으로 반박했다.

이재환 본부장 지시에 대해 기자들은 “명백한 편성 규약 위반”이라며 ‘구체적인 취재 및 제작 과정에 부당한 압력(6조 2항)’을 행사했으며, ‘실무자와 성실하게 협의하고 설명(6조 3항)’을 하지도 않았고, ‘의견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수정해서도 안 된다’는 6조 4항을 정면으로 위반했다고 했다. 기자들은 “최소한 국장처럼 제작진과 대화는 해야 했다”며 “실무자는 ‘의견을 제시할 수 있고, 결정 과정에 참여하는 권리를 갖기 때문(7조 3항)’ 이고, ‘직업적 신념과 실체적 진실에 반하는 프로그램 취재와 제작 혹은 은폐나 삭제 강요를 거부할 수 있기 때문’(7조5항)”이라고 주장했다.

이 본부장이 제작진에게 한마디 없이 방영 당일인 14일 오전 전국언론노동조합 KBS본부에 임시 공정방송위원회 소집을 요청한 데 대해서도 기자들은 “말은 공방위 요청이지만 공문을 보면 결방 통보였다”며 “사안을 전혀 모르던 KBS본부에 공문을 보내면서 3시까지 공방위에 응하지 않으면 결방시킬 수 있다고 써놨다”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KBS본부도 15일, 16일 성명을 내어 “임시 공방위 개최를 요구하면서 불방될 경우 그 책임을 노동조합에 전가하려한 것도 황당하다”고 밝혔다. 이어 “사측의 부당한 간섭으로 해당 프로그램은 송출시간 직전에서야 제작을 완료했다. 조금만 늦었다면 방송 자체가 어려울 수 있었다”며 “사측의 요청대로 오후 3시에 공방위를 열었다면 제작이 가능하기나 했겠는가. 사실상 방송무산의 책임 노동조합에 떠넘기려고 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15일 KBS 사측은 “보도시사본부장은 14일 노조 측에 임시공방위 개최를 요구하였으나, 노조 측이 공방위 개최 요구를 수용하지 않아 무산됐다”고 주장했다. 또 “보도시사본부장은 해당 프로그램과 관련해 ‘KBS 방송제작 가이드라인’에 따라 공정성이 훼손될 위험성이 있는 프로그램 내용 일부에 대한 의견을 제시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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