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안국제공항에서 일어난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를 취재한 기자들은 대체로 준비 없이 재난 현장에 투입됐다. 지난해 12월29일 주말 당직을 위해 출근했다가 급히 파견된 한 기자는 집에 들르지 못해 어떤 짐도 챙길 수 없었다. 사흘 넘게 옷을 갈아입지 못했다.
‘일단 가라’는 외에 별다른 지시나 안내를 받지 못한 한 취재팀은 사고 당일 기초취재를 마친 깊은 새벽에서야 잘 곳을 찾아다녔다. 기자들은 대개 서너 시간씩 쪽잠을 자며 취재했다. 거의 모든 기자가 언제까지 머물러야 하는지, 교대 근무자는 언제 오는지 듣지 못했다.
식사 대책도 마땅치 않아 하루에 1끼 정도만 먹는 기자들도 많았다. 다른 기자는 “초코바 몇 개만 챙겨왔는데 주변에 식당이 없을 줄 몰랐다”며 “자원봉사자들이 김밥이나 라면을 뒀는데도 유족이 먹어야 할 식사라고 생각해 손대지 못했다”고 말했다.
언론이 여러 차례 재난보도를 겪으면서 심리상담과 치료 지원 체계는 어느 정도 마련했지만 트라우마 예방과 관리는 여전히 미흡하다. 사후적인 치료에만 의존해서는 트라우마에 효과적으로 대처하기 어렵다는 지적이 나온다. 예방은 적은 비용으로도 가능하지만 질환이 되면 회복에 시간과 노력이 많이 필요해진다.
국가트라우마센터와 한국언론진흥재단이 2022년 만든 ‘트라우마 예방을 위한 재난보도 가이드라인’은 취재진을 정신적으로 보호하기 위해 언론사가 재난안전용품을 지원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많은 언론이 쉽게 지나치지만 물질적 충족도 심리에 미치는 영향이 크기 때문이다.
심민영 국가트라우마센터장은 “심리적 저항성을 높이려면 ‘안전’과 함께 편안함을 느끼는 ‘안정감’도 필요하다”며 “재난은 단시간에 업무가 폭증하는 특성이 있는데 먹을 것, 입을 것이 충족되지 않으면 빨리 소진되고 재난 업무 종사자는 정신적 충격에 취약해진다”고 말했다.
가이드라인은 3일치 이상의 부패하지 않는 식품과 물, 손전등, 침낭과 담요, 여성용품, 구급상자를 평소 갖춰두고 있어야 한다고 규정한다. 유통기한이 지난 물품은 평소 주기적으로 교체해 둬야 한다. 심지어 수면안대와 귀마개도 준비하라고 세세히 조언한다. 보조 배터리는 노트북 충전이 가능한 2만 암페어 이상 용량인 것이 좋다.
심 센터장은 “취재 질서는 유족을 위한 일인 동시에 기자 자신을 위한 트라우마 예방법”이라는 점도 강조했다. 옳지 않은 일을 강요받으면 ‘도덕적 상해’를 입을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다른 기자는 “유족 취재는 많을수록 좋다면서 타사에 물을 많이 먹이라는 지시를 받았다”며 “남의 슬픔으로 단독을 구하려니 스스로가 혐오스러웠다”고 말했다. 그는 “꿈에서 길을 걸어가다 시신을 발견해 신고하려는데 시신의 손에 휴대전화가 있어서 쥐려는 순간 시신이 조각나는 똑같은 악몽을 사흘 연속으로 꿨다”고 말했다. 반복된 회상과 같은 재경험 반응은 트라우마의 일반적 증상이다.
‘트라우마 저널리즘’ 연구자인 이정애 SBS 기자는 “심리치료비 지원만 해주면 다 된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업무가 왜곡된 상태에서는 치료받고 돌아와도 같은 일이 반복된다”며 “취재 관행을 어떻게 바꿀지 노력이 이뤄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상담을 받더라도 언론의 독특한 업무 방식을 이해받지 못하고 되레 상처를 입는 일도 있다.
악몽에 시달리던 기자는 회사에 치료받겠다는 말은 차마 하지 못했다. 무안에서 돌아와 곧바로 다른 취재를 해야 해 팀에서 혼자 빠지기가 어려웠다. 가이드라인에 따르면 언론사는 재난 취재 중 기자의 트라우마 여부를 점검하고 휴가를 주거나 업무를 바꿔주는 등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 치료비 지원 신청이 있을 때까지 기다리면 안 된다는 것이다.
언론사가 기자를 방치해 심리적 외상을 키우면 법적 책임을 져야 할 수도 있다. 호주 일간지 ‘디 에이지’의 한 기자는 회사를 상대로 손배소를 제기해 6년 만인 2019년 승소했다. 언론사의 책임을 인정한 세계 최초 사례다. 6년 동안 사건·사고를 취재하다 외상후스트레스장애가 생겼는데 스포츠 부서로 옮긴 지 1년 만에 다시 사회부로 발령 내 언론사 잘못이 인정됐다.
트라우마 관리는 상시적으로 이뤄져야 한다. ‘동료 지지(Peer Support)’가 효과적인 방법이 될 수 있다. 일정한 트라우마 교육을 수료한 기자들이 자원봉사자가 돼 동료에게 먼저 말을 걸어주고 공감과 지지를 보내는 프로그램이다. 회사 내부에 봉사자의 연락처가 공개돼 힘든 취재를 하는 기자들이 연락을 취할 수 있다.
트라우마를 혼자만의 문제로 여기기보다 같은 처지의 다른 동료와 공감하고 지지를 얻는 것이 효과적이다. 동료는 직업적 이해도가 높기 때문이다. 전문적인 상담은 아니지만 대화 내용은 비밀로 지켜야 한다.
동료 지지는 BBC와 워싱턴포스트 등이 도입했고 특히 호주 ABC 방송에서는 2006년 도입한 이후 봉사자가 5명에서 100명가량으로 늘 만큼 상당히 활성화돼 있다. 국내에서도 이정애 기자가 2023년 방송기자연합회 트라우마 저널리즘 연수 과정을 수료한 취재기자와 영상기자, 편집기자 등 10여 명을 중심으로 동료 지지를 이어가고 있다.
이 기자는 “우리나라에서는 큰 언론이 아니고는 개별 언론사에서 동료 지지를 하기는 어렵다”며 “한국기자협회나 방송기자연합회, 여성기자협회 등 보다 큰 기관에서 한국 언론 실정에 맞는 프로그램을 발굴하고 개발해 더 많은 사람이 혜택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Copyright @2004 한국기자협회.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