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작 ‘채식주의자’로 2016년 5월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을 수상한 뒤 한강 작가는 언론 노출을 꺼리고 글의 골방으로 들어갔다. 그랬던 한강 작가는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된 지난해 10월10일 늦은 밤 매일경제신문에 단독 인터뷰로 등장했다. 이 단독 인터뷰로 세상에 이름을 알린 김유태 기자는 “몇 겹의 우연적 요소가 겹쳐 주목을 받았다”고 했지만, 간절한 마음이 없었다면 우연은 운명처럼 찾아오지 않았을 것이다.
한강 작가의 마음을 움직인 김 기자를 12월20일 만났다. “이번에도 못하면 더는 힘들 것이라는 절박함이었어요. 진심을 꾹꾹 눌러 담은 편지를 보내야겠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열흘에 걸쳐 꼭꼭 눌러쓴 질문지와 편지를 이메일로 발송했다. 그때만큼 ‘진인사대천명’이라는 말이 각별하게 다가온 적이 없었다.
질의서를 보내고 7일째 되던 날 이메일이 도착했다. “보내주신 질문지를 잘 받았으며, 마음이 담긴 편지를 감사히 읽었다”로 시작하는 답신이었다. 2018년 봄 또 다른 소설 ‘흰’이 부커상 최종 후보에 오른 이후 몇 차례 두드렸던 인터뷰가 마침내 성사된 것이다. 어떤 희열이 가슴을 파고들었다. 그런데, 13개 질문 중 1개 질문에 답이 없었다. ‘문학이, 소설이 마지막까지 지켜야 할 윤리란 무엇이라고 보시는지요. 소설에서, 또 소설가에 의해, 훗날의 인간이 언어를 사용하는 마지막 날까지도 지켜져야 한다고 믿으시는 ‘무엇’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오랜 세월 기다린 인터뷰가 성사됐으니 그대로 내보내도 될 텐데, 김 기자는 다시 질문을 던졌다. ‘소설을 쓰고 읽는 행위의 힘, 다시 말해 세상에서 소설의 역할은 무엇이라고 보시는지요. 거칠고 딱딱하기만 한 세상에서 소설은 어떤 힘을 가질까요.’ “그 질문이 빠지니까 맥이 풀리는 느낌이었어요. 인터뷰를 이루는 ‘기승전결’의 흐름에서 결이 생략된다고 봤거든요. ‘아, 아니야. 한 걸음만 더 가야해’라고 혼자 생각했어요.”
한강 작가는 “소설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 우리를 연결하는 실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이 질문 때문에 추가 인터뷰가 이뤄졌고, 한강 작가는 며칠 뒤 두 번째 답신을 보내왔다. 10월10일 오전이었다. 그날 저녁 8시 스웨덴 한림원은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한강을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그 시각, 정확히 8시0분 15초쯤 김 기자는 노벨위원회 X(옛 트위터)에서 ‘Han Kang’을 발견했다. 그 순간, 편집국 동료들이 들을 정도로 ‘악’소리가 나도록 비명을 질렀다.
“추가 인터뷰가 없었다면 노벨문학상 발표와 겹치는 시기적인 우연성이 줄어들었을 거예요. 만일 과거에 한강 작가와 인터뷰를 했다면 인터뷰를 하지 않았을 테고, 고교 시절부터 한강 작가의 책에 빠져들지 않았다면 인터뷰를 염두에 두지 않았겠죠. 몇 겹의 우연이 이 인터뷰에 담겨 있습니다. 마치 제가 거쳐온 모든 우연이 바로 이 한순간을 위해 계획된 것만 같은 이상한 기분도 들 정도였어요.”
김유태 기자는 한강 작가의 등단작 단편소설 ‘붉은 닻’이 수록된 소설집 ‘여수의 사랑’(1995)을 비롯해 그의 모든 책을 거의 초판본으로 소장하고 있다. 아내와 연애할 때 처음 권한 소설이 ‘채식주의자’(2007)와 ‘그대의 차가운 손’(2002)이었다. 서울대 국문과 재학 시절 문학수업에서 A4용지 5장짜리 리포트가 주어지면 혼자 20~30장짜리 ‘소논문’을 써냈다. 대학원을 준비하던 시절이었지만 무엇보다 한강 작가의 소설에 매료됐기 때문이다.
“고통에 접근하는 작가의 독특한 문법을 사랑했기 때문이라고 표현해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인터뷰 기사에도 썼습니다만 한강 소설의 키워드는 ‘기억과 상처’라고 생각했는데, 기억의 저편을 열고 환부를 들여다보는 과정을 통해 뭔가를 위로받는 기분을 강하게 느꼈어요. 그게 문학의 본질 중 하나인 ‘공명’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문학은 어릴 적부터 그의 내면에 들어왔다. 고교 시절 ‘야자 땡땡이’ 치고 도서관으로 달려가 문 닫을 때까지 읽었고, 대학 들어가선 도서관 800번대(문학코너) 책장 주변을 자주 기웃거렸다. “그 냄새가 너무 좋았어요. 묵은내라고 해야 하나. 단편소설 한 편을 읽기 위해선 30분쯤 걸리는데, 그 짧은 시간 동안 다른 세계를 걸어다닐 수 있는 자유가 좋았습니다.” 군 복무 때도 연등(취침 시간 이후 1시간 동안 자료실에서 책을 볼 수 있는 시간)하면 1시간 동안 단편 2편씩을 읽었다. 2005년 이상문학상을 받은 단편 ‘몽고반점’의 책장도 그때 펼쳤다.
2010년 첫 기자 시험을 치른 매경에 입사해 2015년부터 경력 대부분을 문학 담당으로 일했다. 집안 사정에 기자 생활의 매너리즘이 더해져 1년 6개월쯤 퇴사했다가 매경에 복직했다. 학보사를 했던 전력이 있었지만, 기자를 업으로 삼을진 몰랐다. 2학년 1학기부터 4학년 1학기까지 5학기를 학보사 기자로 일했다. 그렇다고 기자를 할 생각은 없었다고 했다. 대학 입학 때부터 대학원을 염두에 두었고, 그 믿음은 4년간 한 번도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정작 대학원을 준비하면서 이 길이 맞나 내적 갈등에 휩싸였다. 대학원 면접 전날 밤새 고민하다 면접장에 가지 않았다. 졸업 후 몇 개월 방황하며 백수로 지내다 기자로 방향을 틀었다. 기자 안 한다던 학보사 출신들이 언론사에 들어온 이유와 비슷하다고 그는 웃었다.
그는 기자이면서 시인이자 작가이다. 기자의 삶이 그리로 이끌었다. 문화부 기자로 일하며 시인, 소설가를 인터뷰하면서 느낀 말과 정서에 감염됐고, 시나브로 잊힌 등단의 꿈이 살아났다. 그 와중에 8년간 투병한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절망이 몰려들었고, 시로 풀어내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았다. 그렇게 썼던 시로 등단했다. 2021년엔 시집 ‘그 일 말고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를 펴냈다. 지금도 간간이 시를 쓰고 있다.
지난해 5월엔 ‘나쁜 책: 금서기행’을 펴냈다. 2023년부터 7월부터 6개월간 한 주도 거르지 않고 디지털에 연재한 기획 ‘나쁜 책’을 책으로 묶어냈다. 전 세계 현대의 금서에 관한 책, 금서로 지정돼 읽을 수 없는 책, 필화를 겪었거나 논쟁적인 책을 소개하는 내용이다. 일상적인 취재에 더해 매주 30~40매의 디지털 기획을 쓰기란 고통의 연속이었다. 주중에 책을 읽고 자료를 모아 토요일 오전 8시엔 무조건 카페로 갔다. 한창 아빠랑 놀아야 할 초등학교 1학년 딸이 밟혔지만,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그렇게 6개월간 주말을 통째로 매달렸다. 옌렌커 소설 ‘딩씨 마을의 꿈’을 1편으로 시작한 디지털 기획은 연재 때마다 독자들의 반향을 끌어냈다. 중국계 미국인 작가 아이리스 장이 난징 대학살을 기록한 ‘난징의 강간’(국내에선 ‘역사는 누구의 편에 서는가’란 제목으로 번역 출간) 기사는 200만 이상의 조회 수가 나왔다. 미국 작가 토니 모리슨의 ‘가장 푸른 눈’을 포함해 디지털 기획에서 소개한 금서가 복간될 정도였다. “저만의 기여는 아니죠. 독자들이 관심을 가져줘 복간된 건데, 완전히 잊힌 책이 매대에 다시 꽂힌다는 얘기를 듣고 너무 뿌듯했어요.”
그는 또 다른 책을 내려고 준비하고 있다. 책에 대한 에세이와 소설을 원작으로 삼은 영화에 대한 이야기다. ‘좋아하는 작가’를 묻자 로맹 가리(1914~1980)라고 했다. 세계 3대 문학상인 프랑스 공쿠르상을 두 번 받은 역대 유일의 작가이면서 제2차 세계대전 영웅, 유엔 파견 외교관, 영화감독으로 변신한 인물. 그는 기자 초창기에 로맹 가리의 구술 회고록 번역본 ‘내 삶의 의미’를 읽고 “그 사람의 발끝만이라도 닮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로맹 가리가 생전에 이런 말을 했다고 해요. ‘나는 온전하게 나를 표현했다.’ 저는 이 말을 어떤 기둥이자 좌우명처럼 아낍니다. 로맹 가리에 비견할 수준은 결코 못 되지만, 저는 기자라는 정체성과 시인으로서의 정체성, 또 작가로서의 정체성이 있습니다. 이 셋을 오가면서 저 자신을 풍성하게 존재시키며 살려고 노력합니다. 이룰 수 없는 꿈이겠지만 이룰 수 없기에 간절해지는 무언가를 하나씩은 품어야 삶이 유지된다고 생각합니다.”
대통령이 난데없이 비상계엄을 선포한 그날 밤, 그는 인천국제공항 1터미널 64번 게이트에 서 있었다. 11시에 스웨덴 스톡홀름으로 출발하는 비행기를 타기 직전이었다. 게이트 앞 TV에서 특별담화 영상이 나오기 시작했고, 뒤쪽에서 웅성웅성 ‘계엄’이란 단어가 들렸다. 비행기를 타야 하나 말아야 하나, 영화 ‘터미널’의 주인공처럼 돌아갈 나라가 없어지는 건 아닌지 별의별 생각이 스쳤다.
스톡홀름 한림원 2층에 앉은 기자들이 모두 그랬듯, 그는 한강 작가가 계엄사태에 대해 한 마디 남겨주길 바랐다. “그날 밤 모두들 그러셨을 것처럼 저도 충격을 받았습니다. ‘소년이 온다’를 쓰기 위해 1979년 말부터 진행된 계엄 상황에 대해 공부했는데, 2024년에 다시 계엄 상황이 전개되는 것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한강 작가의 이 말은 계엄에 상처 입은 국민들에게 위로가 됐다.
노벨위원회는 노벨상 시상식에 한국 기자 25명, 만찬에 8명만 초청했다. 김 기자는 시상식과 만찬 모두 초대를 받았다. 시상식 한 달 전 공식 웹사이트에 신청서를 내면서 한강 작가 관련 기사를 영어로 번역한 PDF를 첨부하고, 왜 가고 싶은지 간곡하게 썼다. 어렵사리 취재가 확정되자 그는 노벨상 시상식을 다양하게 바라보고 싶었다. 기자간담회, 강연, 시상식, 만찬 등 행사를 따라가면서도 노벨상 현장의 여러 목소리와 생생한 현장감을 전하려 애썼다.
스톡홀름으로 떠나기 전 장문의 이메일을 보내 알데르스 올손 노벨문학상 심사위원장, 호라세 엥달 한림원 종신회원을 단독 인터뷰했고(무작정 보냈는데 답신이 왔고), 따로 노르웨이 오슬로 퓨처 라이브러리(Future Library·미래 도서관)를 방문해 르포를 썼다. 2114년 출간될 한강 작가의 2019년 글 ‘Dear Son, My Beloved(나의 사랑하는 아들에게)’를 보관하고 있는 도서관이다. 그는 “지금 이 순간이 아니면 다시는 해볼 수 없는 시도들을 마음껏 해보고 싶었다”고 했다.
스톡홀름 한림원, 콘서트홀, 스톡홀름시청 등을 찾을 때마다 경외감이 밀려들었다. 해마다 10월 첫째 주 목요일 노벨문학상 수상자를 발표하는 한림원 2층, 1열 의자에 앉을 땐 심장이 쿵쾅거렸다. 그곳에 앉아 있다는 게 꿈인지 현실인지 믿기지 않았기 때문에 그랬을 것이다. 그는 스톡홀름에 체류하면서 한강 작가와 마주하지 못했다. 아니, 딱 한 번 그럴 기회가 있었다. 12월10일(현지 시각) 시상식이 끝나고 이동한 스톡홀름시청 2층 무도회장. 한쪽에 서 있는 한강 작가와 눈이 마주쳤다. 말을 걸까 말까…. 그때 올가 토카르추크(2018년 노벨문학상 수상작가)가 한강 작가에게 다가갔다. 두 작가가 직접 만나는 모습을 1~2m 거리에서 바라보는 것 자체로 만족했다. 조용히 다가가 두 작가를 사진에 담았다.
김 기자는 문학 담당을 하다가 지금은 미술과 영화를 취재한다. 문학 관련 기사도 계속 쓴다. 고정 코너 ‘시가 있는 월요일’, ‘책에 대한 책’을 맡고, 매달 ‘영화와 소설사이’를 디지털에 연재하고 있다. 이제 16년 차인 그에게 어떤 기자로 남고 싶은지 물었다.
“새해엔 마흔하나입니다. 한강 작가의 말을 빌리면 ‘내가 어디쯤 왔지, 그리고 어디까지 가야 하지’ 생각을 하게 되더라고요. 현직 기자로서는 대략 15년 남짓한 시간이 주어진 것 같습니다. 제가 만나보고 싶고, 취재 또는 인터뷰하고 싶은 분들을 저만의 언어로 기사화할 수 있는 시간이 그리 많이 주어지지 않은 거죠. 어떤 의미에선 촉박하다는 마음, 심지어 조급함까지 듭니다. 그래서 주어진 지금의 시간을 낭비하지 않으려 최선을 다하고 싶습니다. 2학년 딸아이가 있는데 훗날 커서 아빠가 쓴 기사를 검색해 보면서 ‘아빠가 이런 기사를 썼구나, 아빠는 그때 최선을 다하며 살았구나’ 생각하게 된다면 저는 모든 보상을 받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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