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무형유산의 소곤소곤 콘서트

[이슈 인사이드 | 문화] 사지원 동아일보 문화부 기자

사지원 동아일보 문화부 기자

“전시나 체험은 많이 해봤지만, 무대에서 콘서트 식으로 작업 과정을 선보이는 건 처음이었어요. 이 ‘새로운 버전의 공예’를 관객분들이 어떻게 보셨을지 궁금합니다.”


12월13일 오후 서울 중구 한국의집 민속극장에서 국가유산진흥원이 주최한 ‘국가유산 ASMR 콘서트-소리로 담아낸 국가유산’이 끝난 뒤 만난 국가뮤형유산 매듭장 전승교육사 박선경씨(60)는 이렇게 말했다. 그는 이날 매듭을 만들 때 필요한 과정인 ‘다회치기’를 선보였다. 가는 실을 꼬아 끈목(여러 올의 실로 짠 끈)을 만드는 과정이다. 여느 전시와 다른 것은 다회치기 과정에서 소리에 집중했다는 점이다. 8개의 실패와 다회틀이 부딪히면서 나는 나무 소리가 지속해서 들려왔다. 반복되는 소리가 심리적 쾌감과 안정을 주는 자율감각쾌락반응(ASMR)이 공연으로 구현된 것이다.


어딘가 어색했다. 근엄해야 할 국가유산과 잠이 오지 않을 때 찾는 ASMR이란 단어가 조화롭지 않아 보였다. 그러나 극장에 설치된 스피커 23개에서 울려 퍼지는 소리는 ‘비 내리는 소리’, ‘나무 톱밥 만드는 소리’ 등 유튜브에서 자주 소비되는 ASMR 콘텐츠보다 결코 뒤지지 않았다. 하늘색 한복을 차려입은 박씨가 리드미컬하게 손을 움직이는 몸짓과 함께 소리가 어우러져 보다 안정감을 줬다.

국가무형유산 매듭장 전승교육사인 박선경씨(60)가 가는 실을 꼬아 끈목(여러 올의 실로 짠 끈)을 만드는 ‘다회치기’를 하고 있다. 박씨 등 국가무형유산 3명이 작업 과정에서 내는 소리를 감상하는 ‘국가유산 ASMR 콘서트’가 12월13·14일 서울 중구 한국의집 민속극장에서 처음으로 열렸다. /국가유산진흥원

생소한 ‘국가무형유산 ASMR 공연’의 출발점은 온라인이었다. 2019년부터 시작된 유튜브 국가유산채널의 ‘K-ASMR’ 시리즈의 누적 조회수는 현재까지 약 2913만 회. 특별한 대사 없이 소리에 집중한 작업 시연과 어우러진 영상미가 ASMR 마니아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어 오프라인 공연까지 성사된 것이다.


이날 박씨를 비롯해 경기무형유산 지화장 보유자인 석용 스님(57), 충북무형유산 증평 필장 보유자인 유필무씨(63) 등 인기가 많았던 영상 속 주인공 세 명이 오로지 소리에 집중한 공연을 선보였다. 석용 스님은 종이꽃을 만들기 위해 가위로 종이를 사각사각 자르고, 주름을 만들기 위해 종이를 바스락바스락 접었다. 유필무 필장 보유자는 체로 모난 붓털을 걸러내 소리를 냈다.


처음 시도하는 공연이기에 일어난 해프닝도 있었다. 필장 유필무씨가 가지고 온 최고급 붓이 너무 부드러워서 체와 부딪힐 때 ‘쓱쓱 싹싹’ 소리가 제대로 나지 못한 것이다. 유씨는 “좋은 공연을 선보이려 비싼 붓을 가지고 왔는데 오히려 ASMR을 선보일 때는 불리했다”며 “다음엔 싸구려 붓을 가져와야겠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또 집중도를 높이기 위해서라지만 한 회당 관객 수가 50명에 그친 것은 조금 아쉬운 부분이었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나이 지긋한 국가무형유산들의 개방적인 태도였다. 낯선 ASMR과 자신의 작업물을 연계하는 게 부담스러웠을 수도 있었을 텐데, 적극적으로 공연에 참여했다고. 42년째 종이꽃을 만드는 석용 스님은 “공연을 해보니 많은 사람들이 무형유산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뿌듯했다”며 “무형유산의 매력을 알릴 수 있는 다양한 콘텐츠가 더 많이 생겼으면 좋겠다”고 했다. 전통 붓 제조 방식을 고집스럽게 지키고 있는 필장 유씨도 “국가유산의 명맥이 끊기지 않고 많은 이들에게 전해졌으면 한다”고 했다.


무형유산을 새로운 것과 접목하려는 끊임없는 시도가 있었기에 가능한 공연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루하고 지루하지 않은 콘텐츠. 가볍지만 깊은 콘텐츠를 만들고 싶다”는 국가유산진흥원 헤리티지미디어팀장의 말대로, 국가유산을 딱딱하게 여기지 않고 접근할 수 있는 새로운 통로를 만들려는 시도가 끊임없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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