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노 이긴 분노, 내란범들의 시계는 아직 멈추지 않았다
[윤석열 정권 2년7개월 대체 무슨일이]
취임 넉달뒤 '바이든·날리면' 공방
도어스테핑 중단… 가짜뉴스 타령
방송관련 법·제도 통째로 흔들더니
수신료 분리징수, YTN 민영화까지
채상병·김건희 이어 명태균 터지고
비상계엄 버튼 누르며 여당과 자멸
한밤의 난데없는 계엄으로 나라를 혼란에 몰아넣은 대통령이 14일 “결코 포기하지 않겠다”는 말을 남기고 시야에서 사라졌다. 국회는 이날 오후 5시 국회의원 204명의 찬성으로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가결했고, 2시간여 뒤인 7시24분부로 대통령의 권한은 정지됐다. 12·3 불법 계엄 선포 11일 만, 취임 949일 만이었다.
대통령 탄핵. 한 세대에 한 번 겪을까 말까 한 일이 10년도 안 돼 또 일어났다. 20년 사이에만 벌써 세 번째다. 2004년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소추안은 헌법재판소에서 기각됐고, 박근혜 전 대통령은 2017년 헌재의 파면 결정으로 직을 잃었다. 윤석열 대통령 탄핵심판은 내년 2~3월경 결론이 나올 것으로 전망되는데, 기각 시엔 엄청난 사회적 혼란이 예상되고, 인용 시엔 8년 만에 ‘장미 대선’을 치러야 하는 만큼 역시 분주한 일정들이 예고돼 있다. 모처럼 선거도, 올림픽이나 월드컵 같은 ‘특수’도 없던 2025년이 시작부터 만만치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유사 계엄’ 치하였던 2년 7개월
‘모든 언론과 출판은 계엄사의 통제를 받는다.’ 그리고 위반자는 ‘처단한다.’ 12·12와 5·18을 영화로, 글로, 사료로 접하고 배웠을 대다수 기자에게 3일 밤 계엄과 함께 내려진 ‘포고령 1호’는 도무지 현실감이 없었지만, 기자들은 자신도 모르게 움츠러드는 것을 느꼈다. 야당을 출입하는 한 정치부 기자는 기자협회보에 “야당 의원들 활동을 보도해도 되는지”, “쓴 기사들이 나중에 문제가 되지는 않을지” 두려웠다고 털어놨다. 그래도 기사는 쓰고 신문과 잡지는 만들어야겠기에 통신사용을 제한하며 모처로 몸을 피한 기자들도 있었다.
돌이켜보면 이와 유사한 일들이 2년 반 동안 이어졌다. 남보라 한국일보 기자의 표현을 빌리면 ‘유사 계엄’ 치하였다. 정권이 바뀌면 관행처럼 이뤄지는 언론 관련 기관장 교체, 공영방송 사장과 이사진 교체 등은 예상 가능한 범주의 일이었다. 오히려 방송통신위원장 교체까지는 시간이 꽤 걸린 편이었다. 문재인 정부에서 임명된 한상혁 위원장을 몰아내기 위해 이 정권은 검찰, 감사원은 물론 국무조정실과 대통령실 공직기강비서관실까지 총동원해야 했다.
이해할 수 없는 행보가 시작된 건 취임 넉 달 뒤부터였다. 2022년 9월22일 MBC가 미국 순방 중인 윤 대통령의 비속어 발언을 보도하면서 대통령의 언론에 대한 ‘격노’가 시작됐다. 해외 순방을 이틀 앞두고 MBC 출입기자들에게 ‘전용기 탑승 불가’를 통보하더니, 취임 후 약 반년간 이어온 출근길문답을 일방적으로 중단해 버렸다. 윤 대통령은 MBC의 비속어 보도를 두고 “국가 안보의 핵심축인 동맹 관계를 사실과 다른 가짜뉴스로 이간질하려는, 악의적 행태”라고 비판하며 전용기 탑승 배제는 “헌법수호 책임의 일환으로 부득이한 조치였다”고 말했다. 이번 계엄 포고령에도 포함된 ‘가짜뉴스’ 타령의 서막이었던 셈이다.
이후 MBC에 어떤 조치들이 취해졌나. 고용노동부는 MBC 특별근로감독을 실시했고, 국세청은 세무조사를 통해 520억원의 추징금을 부과했다. 김효재 방통위원장 직무대행은 권태선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장을 해임하며 MBC 사장 교체 작업을 시작했다. 법원이 이에 제동을 걸지 않았다면 이미 MBC는 다른 세상이 되었을지 모른다. 대통령의 격노는 이에 그치지 않아 취임 후 가진 네 차례의 기자회견에서 MBC 기자에겐 단 한 번도 질문 기회를 주지 않았다. 그리고 계엄 발동을 준비하며 경찰청장 등에게 MBC 장악을 지시한 사실이 경향신문 보도로 밝혀졌다.
절차상 하자도 가뿐히 ‘패싱’… 계엄서도 드러나
기존의 방송 제도나 시스템을 송두리째 흔드는 정책 결정이 어떤 설명이나 맥락도 없이 추진되곤 했는데, 지금 보면 그 시작 또한 대통령의 격노에서 비롯됐다고 하면 수긍이 된다. 공영방송 KBS의 재원 구조를 뒤흔들 TV 수신료 징수방식 변경 논의가 지난해 3월 ‘국민제안’ 방식으로 시작됐는데, 그보다 2주 앞서 KBS가 국가수사본부장에 내정된 정순신 변호사의 아들 학교폭력 비호 전력을 보도한 게 결정타였다는 설이 당시 무성했다. 한 달간 의견수렴을 진행한 대통령실은 ‘중복투표 가능’ 등 시스템 하자에 대한 지적에도 불구하고 96.5%가 징수방식 개선에 찬성한다는 결과를 그대로 인용해 방통위 등에 수신료 분리징수를 위한 법령 개정을 권고했고, 그해 7월5일 방통위는 일사천리로 방송법 시행령 개정안을 의결했다. 절차상 오류 등을 개의치 않는 윤 대통령의 특성은 이번 계엄 선포 과정에서도 드러난 바 있다.
재원 문제를 건드리고 나니 KBS 사장 교체는 어려울 게 없었다. 내부에서도 크게 지지를 받지 못한 김의철 사장은 임기를 15개월 남기고 해임됐고, 두 달 뒤 ‘방송 문외한’ 박민 사장 체제가 출범했다. 그리고 올 2월, 윤 대통령은 신년 기자회견을 생략하고 KBS와 특별 대담을 녹화로 진행했다. 이때 윤 대통령은 김건희 여사의 명품백 수수 의혹을 ‘조그만 파우치’로 축소 포장한 박장범 앵커에게 국무회의장 자신의 자리에 앉아 보라고 권했고, 11월엔 그를 KBS 사장 자리에 앉혔다.
30년 가까이 준공영 체제를 유지해온 YTN을 민영화할 때도, 국가기간통신사 연합뉴스에 지원하는 정부 구독료를 대번에 80% 이상 삭감할 때도 납득할 만한 설명은 없었다. 합의제로 운영돼야 할 방통위와 방심위를 사실상 독임제 부처처럼 운영한 건 그 정점이다. 민주주의 원칙에 기반, 대통령과 여야가 각각 추천권을 행사하도록 한 방통위와 방심위엔 현재 대통령이 추천한 인사만 있는 상태다. 방통위는 1년 가까이 2인 제제로 운영되다 8월부터는 위원장 직무대행 1인만 남아 아무런 의사결정을 할 수 없게 됐고, 9인 정원인 방심위는 대통령이 위촉한 위원 셋이서 여전히 편향 심의를 남발하고 있다.
현실 인식, 계엄 직전까지도 민심과 동떨어져
대통령의 격노는 ‘채 상병’ 사건 수사와 보도 과정에서 수면 위로 드러났고, 이때를 기점으로 보수언론에서도 정권을 향한 비판과 경고의 목소리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잇따른 김건희 여사 관련 의혹 등 ‘영부인 리스크’도 커졌다. 윤 대통령은 취임 2주년에 즈음해 출입기자들과 만찬을 갖고 계란말이와 김치찌개 등을 제공하며 뜬금없이 언론인 해외연수를 대폭 늘리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임기 반환점을 앞둔 대통령을 향한 경고음은 이미 커질 대로 커진 뒤였다.
9월, 뉴스토마토 보도를 시작으로 이른바 ‘명태균 게이트’가 열렸다. 10월31일 더불어민주당은 윤 대통령이 취임 전날 명씨와 공천 관련 통화한 육성을 공개했다. 1주일 뒤, 윤 대통령은 기자회견을 열고 허리 숙여 사과했지만, 김 여사 비호에만 급급하고 반말을 일삼아 비판 여론은 더 비등했다. 그런데도 대통령실 정무수석은 당시 기자회견에서 대통령의 사과가 두루뭉술하다고 지적한 기자에게 “무례하다”고 발언, “지금이 왕정시대냐”는 비난을 샀다. 당시 많은 언론이 민심과 동떨어진 대통령실의 현실 인식을 비판했는데, 이는 2주 뒤 느닷없는 대통령의 계엄 선포로까지 이어졌다.
대통령의 격노가 만들어낸 여러 파행은 분노한 민심과 헌법이 정한 절차에 따라 일단 멈춰선 상태다. 하지만 헌법재판소의 파면 결정까지는 많은 시간과 여러 절차가 남았고, 따라서 그 과정에서 언론이 해야 할 역할은 여전히 많다. 전국언론노동조합이 탄핵안 가결 다음날 성명에서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라고 한 이유다. 한국기자협회도 14일 국회의 탄핵안 가결 직후 성명을 내어 “위정자들의 차후 행보를 두 눈 부릅뜨고 지켜볼 것”이라고 했다. 기자협회는 “언론자유와 민주주의 회복, 시민사회의 불안감 해소를 통한 일상회복을 위해 힘을 보탤 것”이라며 “위대한 시민과 함께하는 언론의 정도를 걷겠다”는 다짐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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