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정도면 성공적인 ‘연출’이었던 것 같다. 8일 조간신문 1면은 ‘고개 숙인’ 대통령의 사진으로 채워졌다. 오직 동아일보만 달랐다. 윤석열 대통령은 전날 기자회견에서 “제 주변의 일로 국민께 걱정과 염려를 드렸다”며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굽혀 사과했다.
문제는 무엇을, 왜 사과하는지가 분명하지 않았다는 점이었고, 오죽하면 기자회견 자리에서 출입기자가 “두루뭉술하고 포괄적”이라며 자세한 설명을 요구하기도 했다. 하지만 대통령은 구체적인 언급을 피하며 “어찌 됐든” 사과한다고만 했고, 이로 인한 답답함은 오늘 아침 신문에서도 그대로 전해졌다.
8일 전국 단위 주요 일간지들은 대통령 기자회견 내용을 1면 머리기사와 2면부터 3~4개 면을 털어 상세하게 전했다. 중앙일보만 2면에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 뉴스를 싣고 이어 3~6면을 기자회견 소식으로 채웠다. 담화문 발표를 제외하고도 2시간이 넘는 장시간의 회견이었던 만큼 김건희 특검, 공천 개입, 야당과의 소통,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와의 관계 등 이슈별로 나눠서 다뤄졌다.
같은 기자회견을 보며 같은 대통령의 말을 들었지만, 이를 보도하는 신문들 사이에선 시각차가 드러났다. 대통령이 사과했다는 자체에 의미를 둔 신문이 있었는가 하면, 하나 마나 한 사과였다고 혹평한 신문들도 있었다.
‘사과’ 주목한 서울신문·조선일보... 대부분 매체들은 부정적 평가
전자에 해당하는 게 서울신문과 조선일보다. 서울신문은 1면부터 5면까지 기자회견 소식을 전했는데, 거의 대통령의 발언을 따옴표로 전하기만 한 수준이었다. 논란이 되는 발언 등을 따로 짚은 기사도 없었다. 사설에서도 “김건희 여사 문제 등으로 민심이 악화된 상황에 국정 최고책임자로서 이제라도 대국민 사과를 실행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평가했다.
조선일보도 2면에 <처음으로 허리 굽혀 사과…“죄송” “불찰” 12차례 몸 낮춰>란 제목의 머리기사를 싣고 대통령의 사과 등 회견의 ‘형식’에 먼저 주목했다. 조선은 사설에서도 “윤 대통령은 이날 각종 잘못을 인정하고 수차례 사과했다. 2시간 20분 동안 기자들의 질문에 끝까지 답하면서 소통하려는 노력도 보였다”고 평했다.
다른 신문들은 대체로 이번 회견에 부정적인 평가를 내놨다. 동아일보는 대통령의 발언을 단순 전달하지 않고 ‘그럼에도’ 풀리지 않은 의혹과 김건희 여사 수사 관련 사실관계가 틀린 발언들을 지적했다. 중앙일보도 3면 머리기사 제목을 <고개 숙였지만, 국민은 사과받지 못했다>로 했고, 6면 머리기사에선 대통령의 회견 중 반말 논란 등을 다뤘다.
한겨레신문도 2면 머리기사에서 회견을 시청한 민심의 반응을 먼저 전하고, 특검이 위헌적이라거나 김 여사 수사에 수백 명을 투입하고도 기소하지 못했다는 대통령 주장을 ‘팩트체크’ 하는 기사도 따로 실었다. 공천 개입 의혹과 관련해 “외압이 아닌 의견”이라는 대통령 말에도 “궤변”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동아일보 “윤 대통령, 김 여사 변호인 같았다”
사설에선 신문들의 더 혹독한 평가가 나왔다. 다음은 8일 주요 일간지 관련 사설 제목들.
경향신문 <특검 제도마저 부인한 윤 대통령, ‘마지막 기회’ 걷어찼다>
국민일보 <尹 사과했으나 의혹 해소는 미흡… 쇄신 약속 꼭 실천해야>
동아일보 <“어찌됐든 사과” “육 여사도”… 어리둥절했던 140분 회견>
서울신문 <尹 “저의 불찰”… 체감할 후속 조치 최대한 서둘러야>
세계일보 <고개 숙여 사과했지만, 국민 눈높이에 못 미친 대통령 회견>
조선일보 <윤 대통령 크게 바꿔 크게 얻기를 바란다>
중앙일보 <‘어쨌든 사과한다’만 기억나는 윤 대통령 기자회견>
한겨레 <“이런 대통령 처음 봤다”, 이젠 더 이상 기대가 없다>
한국일보 <김 여사 두둔에 힘 실린 회견...우려 키웠다>
중앙일보는 “어제 회견은 지지율 19%로 하락한 현 정부가 소생할 수 있는 천금의 기회”였으나 “결국 허전하고 실망스러운 회견이었다”고 총평했다. “응급수술이 필요한데, 달랑 소화제 하나 처방받은 느낌”이라고도 했다. 중앙은 “대부분의 사안을 자기중심적으로 해명하며 자기합리화를 하다 보니 민심과는 공감의 차이가 확연했다”면서 “국민은 행간에서 “아, 대통령은 미안해 하기보다 억울해 하고 있구나” “아 혹시 사과도 아내의 허가를 받는 건가”란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라고 꼬집었다.
동아일보 또한 “윤 대통령은 심지어 김 여사가 이번 회견 때 ‘사과를 제대로 하라’고 했다고도 했다. 남편이 대국민 사과까지 하게 한 원인 제공자의 조언을 전하며 자신에게 미치는 영향력을 새삼 확인시켜 준 것”이라고 지적했다. 동아는 “윤 대통령은 김 여사 변호인에 가까웠다”고도 했다. 이어 “부인의 억울함과 공로를 전하기에 급급한 답변에선 반성과 성찰, 쇄신 의지는 보이지 않았다”면서 “이처럼 민심과 괴리된 인식이 여전하니 제대로 된 후속 조치도 기대하기 어렵다”고 했다.
절박함 대신 억울함만 읽혔다는 지적은 다른 신문에서도 이어졌다. 한국일보는 “절박함은커녕 '잘하고 있는데 알아주지 않는다'는 호소처럼 느껴졌다”면서 “문제 인식과 처방 모두에서 '국민 눈높이'에 크게 미흡하다고 할 수밖에 없는 이번 회견을 국민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걱정”이라고 했다.
한국은 또 <‘특검’이 위헌이고 정치 선동일 뿐이라는 대통령 인식> 사설에서 “박근혜 정부 국정농단 특검의 수사팀장이었던 윤 대통령이 특검 제도 자체의 위헌성을 말하는 것”이라며 “특검 필요성을 의혹의 당사자나 가족이 판단할 일은 아니다”라고 꼬집었다.
조선일보 “크게 바꿔야 크게 얻는다”
경향신문도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특검에 참여해 오늘의 정치적 입지를 만든 윤 대통령의 말은 이율배반적”이며 “현직 대통령이 특검 제도 자체를 부정한 건 법치 부정”이라고 비판했다. 경향은 윤 대통령이 ‘마지막 기회’마저 걷어찼다면서 “윤 대통령의 담화·회견 내용은 국민과 싸우겠다는 선언이나 다름없다. 그 정치적 후폭풍에 대한 모든 책임은 윤 대통령에게 있다”고 경고했다.
한겨레 역시 “자신의 억울함 토로와 자화자찬으로 140분을 채운 윤 대통령에게 더 이상 어떠한 기대도 걸 수 없게 됐다”고 했다. 한겨레는 “뭘 잘못했는지. 그렇게 사과하라고 하니 일단 ‘사과는 해드릴게’라는 투”라고 지적한 뒤 “심지어 ‘경선 이후 연락한 적 없다’고 했던 대통령실의 거짓 해명 논란도 자신이 아닌 참모진 잘못으로 떠넘겼다”면서 “부끄럽지도 않나. 리더가 이렇게 비겁할 수도 있다는 것이”라고 물었다.
반면 ‘기대’를 버리지 않은 신문들도 있다. 서울신문은 “기왕에 변화와 쇄신을 하겠다면 더 과감하고 신속해야 할 것”이라 했고, 조선일보는 “크게 얻으려면 크게 바꿔야 한다. 임기 후반기를 맞는 윤 대통령이 그렇게 했으면 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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