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만에 돌아온 의병 문서

[이슈 인사이드 | 문화] 사지원 동아일보 문화부 기자

사지원 동아일보 문화부 기자

“원래 의병 후손이 갖고 있어야 할 자료잖아요. 문서를 보니 흥분과 분노가 동시에 올라왔습니다.”


독립운동사 전공자인 박민영 원광대 원불교사상연구원 책임연구원은 올 초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과 함께 ‘한말 의병 관련 문서’를 실사하기 위해 일본에 방문했던 순간을 이렇게 떠올렸다.


이 문서들은 1851년부터 1909년까지 작성된 문건 13건이다. 경기도 양주에서 조직된 의병인 13도 창의군에서 활동한 이들의 공문서와 편지, 면암 최익현(1833~1906)의 서신 등으로 구성됐다. 재단은 일본의 한 고미술업체가 갖고 있던 이 자료를 지난달 복권기금으로 구입해 우리나라로 들여왔다. 특히 13도 창의군에서 활동한 의병 활동을 보여주는 공문서가 발견된 것은 처음이다. 조선 독립운동사의 단면을 보여줄 수 있는 귀한 자료가 오랜 기간 일본을 배회하고 있던 이유는 뭘까.

두 개의 두루마리로 구성된 ‘한말 의병 관련 문서’. 일제 헌병경찰 출신의 개천장치(芥川長治)가 1939년 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국가유산청 제공

두루마리에 덧붙여진 소개글을 보면 경위를 짐작할 수 있다. 일제 헌병경찰 개천장치(芥川長治)는 1939년 8월 문서들을 비단과 두꺼운 종이를 발라 표장한 두 개의 두루마리로 만들었다는 사실을 밝혀놨다. 또 각 두루마리에는 ‘한말 일본을 배척한 두목의 편지’, ‘한말 일본을 배척한 폭도 장수의 격문’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불령패잔(不逞敗殘)한 무리들이 ‘의암선생문집’을 편집하는 곳을 급습해 다수의 불온문서를 압수했다.” 개천장치는 약 100년 전인 1918년 항일 의병장 유인석의 시문집 의암집(毅庵集)을 제작하던 현장을 급습해 문서를 탈취했다는 기록도 남겼다. 곳곳에 의병을 불온하게 여기던 지배자 일제의 시각이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1870년대 태어난 개천장치는 1910년 한일합병 전에는 의병을 토벌하다가 합병 후 조선을 떠나지 않고 헌병경찰로 눌러앉은 것으로 추정되는 인물이다. 1913년 헌병경찰제가 시행되면서 조선총독부 헌병오장(憲兵伍長)을 지냈고, 1935년까지 용정, 하얼빈 등에서 일본 제국 총영사관 경찰부 경시(警視)를 지냈다. 퇴임 후 문서들이 일본으로 반출됐을 가능성이 크다. 박 연구원은 “탈취한 문서 중 가장 귀중해 보이는 것들을 따로 빼돌려 소장용으로 묶어둔 것으로 추정된다”고 했다.


문서를 보면 당시 나라를 빼앗길 위기에 처한 의병장들이 한 자 한 자 붓을 눌러썼을 장면이 상상된다. “막내아우가 여기 있지 않은데 (중략) 눈물을 흘리다가 저도 모르게 어지러워 땅에 쓰러졌습니다. 분하고 원통하여 죽고 싶은데 무어라 형언할 수 없습니다.” 허겸(1851~1939)은 13도 창의군 군사장이었던 동생 허위(1855~1908)가 일제에 체포된 나흘 뒤 편지에 자신의 슬픈 심정을 남겼다. 그러면서도 “서로 사랑하고 보호하길 전보다 더한 후에야 국권을 회복할 것”이라며 동료들을 격려한다. 허위는 일제에 체포되는 당일까지도 의병 활동을 고취시키는 편지를 남겼다.


주권을 강탈당한 나라의 현실은 슬프지만 의연하게 맞서는 선조들의 모습을 알 수 있는 유물이 돌아왔다는 사실은 분명 반갑다. 돌아오기까지 100여 년 걸렸다는 사실은 씁쓸하다. 개천장치처럼 독립운동을 핍박하던 일제에 의해 반출됐을 수많은 유물들의 존재에 더욱 관심을 가져야 한다. 1909년 2월 의병장 윤인순(1880~1909)은 “살아서는 대한의 백성이 될 것이요, 죽어서는 대한의 귀신이 될 것”이라며 “너희들은 빨리 생각해 서둘러 도모하라”는 고시를 남겼다. ‘독립기념관장 인선’과 ‘건국절 논란’ 등으로 반으로 쪼개진 광복절 행사를 보는 우리도 되새길 가치가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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