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밥과 뜨거운 국물의 융합… 토렴 국밥 '채움과 비움' 맛보다

[기슐랭 가이드] 전주시 운암콩나물국밥

지난해 여름 기록적인 폭우를 뚫고 전주남부시장을 찾았다. 친한 기자와 함께 물에 빠진 생쥐 꼴로 시장 바닥을 한참 헤맸다. 시장 모퉁이에 문턱이 낮아 보이는 ‘운암콩나물국밥’이 나를 불렀다. 토렴 국밥 전문점이다.


콩나물국밥의 구성물은 밥, 건더기, 국물로 단출하다. 가스레인지에 적당히 끓여나온다는 이미지 때문에 조리법도 단순하게 인식된다. 순전한 착각이고 오해다. 토렴 국밥에 대한 명예훼손이다.

토렴 국밥은 찬밥이 담긴 뚝배기에 솥에서 끓인 국물을 붓고 덜어내기를 여러 번 해서 완성한 음식을 가리킨다. 적당한 온도로 맞추기 위해 반복하는 조리 행위가 토렴질이다. 찬밥에 국물이 서서히 스며드니 퍼지지도 딱딱하지도 않은 식감을 즐길 수 있다. 채소와 오징어를 작게 썰어 뚝배기에 얹히고, 뜨거운 물 위에 수란 그릇을 둥둥 띄워 온도를 맞추는 과정까지 쉴 틈이 없다.


찬밥을 훌륭한 식재료로 활용하니 친환경적이다. 적당한 온도의 국밥이라 마음 급한 직장인들이 뜨거운 국물에 데지 않고 즐기도록 배려하는 공감 음식이다. 각종 식재료가 뜨거운 열기를 공유해 새로운 음식으로 발현되니 창조적이다. 게다가 식당 주인이 뜨거운 국물을 직접 다루니 그 수고로움이 눈에 밟힌다.

‘세상만사가 토렴 국밥의 원리처럼 돌아간다면 어떨까’라는 생각이 문득 스쳤다. 토렴 식당에서 사회문화적 코드들이 읽히면서 나도 모르게 “유레카”를 외쳤다. 토렴 국밥에서 우리 시대의 가치 담론을 끌어내는 책을 구상중이었는데 한참 헤매고 있었기 때문이다. 각종 자료와 국내외 문헌 연구로 채울 수 없는 영감을 이 식당에서 얻어내곤 ‘토렴 사회를 꿈꾸며’라는 책을 완성할 수 있었다.


언론도 기자도 정체성 혼돈에 빠진 시대. 세상에 분노하거나 자신이 한없이 초라하다 느낄 때, 비움과 채움으로 다스려보는 건 어떨까. 찬밥과 뜨거운 국물을 끝없이 채우고 비우는 토렴질 앞에 일단 멍 때리기를 해보는 거다. 가끔은 느림의 미학이 보약일 때가 있다. 참고로 부동산과 인건비 상승으로 토렴 국밥집은 멸종 위기다. 토렴의 원형을 맛보려면 지금 떠나라.

※‘기슐랭 가이드’ 참여하기

▲대상: 한국기자협회 소속 현직 기자.
▲내용: 본인이 추천하는 맛집에 대한 내용을 200자 원고지 5매 분량으로 기술.
▲접수: 이메일 taste@journalist.or.kr(기자 본인 소속·연락처, 소개할 음식 사진 1장 첨부)
▲채택된 분에겐 소정의 원고료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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