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늦게 단죄된 위증

[이슈 인사이드 | 노동] 김지환 경향신문 정책사회부 기자

김지환 경향신문 정책사회부 기자

A씨는 2014년 대학 졸업 뒤 CJB청주방송에서 방송작가로 일하기 시작했다. 그의 첫 사수는 무뚝뚝하지만 주위 사람을 잘 챙기는 고(故) 이재학 PD였다. A씨는 촬영이 없을 땐 항상 편집실에 있던 이 PD를 “재피”라고 불렀다. 재피는 이 PD의 별칭이었다. A씨는 이 PD 이야기를 다룬 책 <안녕, 재피>에서 3년 뒤에야 이 PD가 자신과 같은 프리랜서라는 걸 알게 됐다고 했다. “이 PD가 청주방송 소속이라고 생각했어요. 당시 제가 방송일이 처음이라 그냥 직원인 줄 알았죠.”


방송국 직원·작가들은 방송노동자 이재학을 PD로 불렀다. 각종 문서도 이를 뒷받침한다. 이 PD가 맡은 프로그램의 큐시트, 집행내역서, 방송 구성안에는 “연출 이재학”이라는 문구가 있었다.


14년간 방송국에서 일했던 이 PD는 2018년 4월 방송 비정규직 등 동료 스태프 처우 개선을 요구한 뒤 ‘불편한 존재’가 됐다. 회사는 그에게 모든 프로그램에서 손을 떼라고 통보했다. 이 PD는 그해 9월 청주방송을 상대로 근로자지위확인소송을 제기하고 부당해고를 인정해달라고 했다. 청주방송은 이 PD는 프리랜서일 뿐 방송국 노동자가 아니라며 맞섰다.


청주방송 전 기획제작국장인 B씨는 2019년 10월2일 청주지법에 증인으로 출석해 평소 이재학을 PD라고 부르지 않았다고 진술했다. 이 PD가 정확히 무엇을 했냐는 판사 질문에 B씨는 “VJ 프로그램 있지 않나. 그런 개념으로 보면 된다”고 답했다.


1심 법원은 2020년 1월22일 청주방송의 손을 들어줬다. 자신의 생일인 1월30일 1심 판결문을 받은 이 PD는 닷새 뒤인 2월4일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유서엔 이런 내용이 적혀 있었다. “억울해 미치겠다. 모두 알고 있지 않은가? 왜 그런데 부정하고 거짓을 말하나.”


항소심 법원은 2021년 5월 1심을 뒤집고 이 PD가 청주방송 노동자라고 판단했다. 너무 늦게 ‘도착’한 판결이었다. 이 민사소송이 확정되고 3년이 지난 올해 5월3일 또 하나의 판결이 나왔다. 청주지법 형사5단독 정우혁 부장판사는 위증 혐의로 기소된 B씨에게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정 판사는 B씨가 의도적으로 이 PD 지위를 부정하는 증언을 한 점, B씨 증언이 1심 판결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이는 점, B씨 증언 뒤 이 PD가 자살한 점 등을 양형 이유로 들었다.


방송사들은 무늬만 프리랜서였던 PD·방송작가가 노동자라는 판례가 쌓여가자 ‘노동자성 흔적 지우기’에 공을 들이고 있다. 프리랜서 계약 종료 직전 ‘부제소 특약’ 작성을 강요하는 사례도 있다. 특약엔 “어떠한 경우에도 을은 갑에 대해 고용관계를 주장할 수 없다” 등의 조항이 담겨 있다. 이 특약이 향후 소송 시 방송 비정규직 노동자에게 족쇄가 될 수 있다는 점을 노린 것이다.


방송사 정규직 중 ‘송곳 같은 인간’이 많을 것이라고 기대하진 않는다. 비정규직 백화점인 방송사에 그런 달달한 것이 남아있길 바라는 것은 연목구어에 가까울 수 있다. 다만 위증까지 하면서 ‘적극적 가해자’가 되는 건 다른 문제다. B씨는 유족에게 사과하는 대신 항소를 선택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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