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기관을 동원해 압박하던 방식이 성에 차지 않았던지, 윤석열 정부는 돈줄을 죄어 공영방송을 길들이려 하고 있다. 기자협회보는 KBS·EBS·TBS·YTN·MBC 등 5개 방송사 노조위원장 연속 기고를 통해 방송의 자유와 독립을 위협하는 권력의 움직임과 그 파장을 짚어본다. <편집자 주>
2500원의 수신료 중 EBS가 받는 금액은 70원입니다. 요즘 70원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요? 과자 하나, 아이스크림 하나도 사 먹기 힘든 돈입니다. 하지만 EBS는 이 작지만 소중한 수신료를 통해 정말 많은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아이가 셋인 우리 집 얘기를 해보겠습니다. 지금 초등학교 4학년인 우리 집 둘째는 코로나가 한창이던 2020년 초등학교에 입학했습니다. 말이 입학이지 입학식은커녕 한 주에 한 번만 마스크를 쓰고 등교했습니다. 주변 친구들과 얘기 한마디 못 하며 그렇게 1·2학년을 보냈습니다. 입학 후 몇 개월간 수업은 TV를 통해 들었었더랬죠. 바로 EBS 온라인 클래스가 우리 아이의 첫 수업이자 EBS 이선희 선생님이 우리 아이의 첫 담임이었습니다. 코로나19가 만연하던 시절, 수신료는 이렇게 학교에 가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온라인 클래스를 만들어주었습니다. 만약 EBS 온라인 클래스가 없었더라면 우리 집 둘째는 그 소중한 2년을 그냥 허송세월하며 보냈을지도 모릅니다.
여러분이 내주시는 수신료를 EBS는 이렇게 사용합니다. 코로나19로 학교에 가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온라인 클래스를 만들어주고, 학원 하나 없는 도서벽지의 아이들이 EBS를 보고 꿈을 키우게 합니다. 하루 5분 방송되는 <지식채널e>는 TV에서 시간 맞춰 보진 않지만, 여전히 초중고 대학교에서 선생님들이 가장 선호하는 교육자료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인기 있는 아이돌은 볼 수 없지만 <스페이스 공감>을 통해 상업방송에서는 할 수 없는 ‘인디 음악’과 ‘언더 음악’의 장이 만들어집니다. <방귀대장 뿡뿡이>, <딩동댕유치원> 같은 유아 프로그램을 보며 지금의 부모님들도 자라왔는데, 이제 우리 아이들이 자라고 있습니다.
EBS는 예능과 드라마 일색의 대한민국 방송판에서 많은 교육 다큐멘터리와 인문 다큐멘터리를 제작하여 우리 사회에 어젠다를 던지고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자부합니다.
이러한 것들이 가능했던 이유는 국민 여러분이 내주신 소중한 TV 수신료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EBS에 TV 수신료란 학교 교육 보완, 평생교육 강화라는 설립목적을 충실하게 이행할 수 있는 기반이고 정말 이러한 일들을 가능케 하기 위한 가장 값싼 비용입니다. 산업 논리로 무장된 글로벌 OTT나 상업방송에서는 제작할 수 없는 어린이, 청소년, 노인, 다문화, 장애인 등 우리 사회의 소외계층을 위한 콘텐츠를 제작하여 공영방송의 책무를 다할 수 있도록 하는 최소한의 장치입니다.
그런데 수신료 분리 고지·징수를 위한 방송법 시행령이 개정되어 지금 시행되고 있습니다. 원하시면 수신료를 내지 않을 수 있고, 2500원의 수신료를 내지 않아도 단전되는 상황은 발생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정부나 방송통신위원회가 얘기하는 것처럼 ‘TV를 보지 않는 사람들에게 선택권을 주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커피 한 잔 값도 되지 않는 수신료 2500원이 없다면 KBS와 EBS는 더 이상 아무런 공적 역할도 수행하기 힘든 상황이 됩니다. 공영방송 본연의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는 것을 넘어서 생존 자체가 불가능할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에서 보장한 공영방송의 근간이 수신료 분리 고지·징수로 흔들리고 있습니다. KBS 보기 싫다고, EBS는 잘 안 본다고 그러기에 수신료를 내기 싫다는 의견을 국민 모두의 의견이라고 판단하고 수신료 분리 고지·징수를 지속한다면 더 많은 사회적 비용을 정부가 부담해야 하고 그로 인한 국민의 부담은 훨씬 가중될 것입니다.
공영방송은 마치 물과 공기 같습니다. 평상시에는 무색무취하고 존재감마저 흐릿하지만 없으면 안 되는 존재입니다. EBS의 모든 구성원은 수신료의 가치를 너무나 귀하게 여기고 있고 공영방송이 해야 할 공적 책무를 감당하고 있음에 큰 자부심을 느끼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묵묵히 국민의 곁에서 물과 공기 같은 역할을 해나갈 것을 약속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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